느리면서 생생하게

2022.07.30 03:00 입력 2022.07.30 03:01 수정

‘브레인 포그’라는 단어가 흐릿한 머릿속에 ‘콕’ 박혔다. 브레인 포그는 뇌에 안개가 낀 것처럼 멍한 현상을 가리키는 의학 용어이다. 집중력과 기억력이 떨어지고 육신의 피로감이 계속되며 자칫 치매로 이어질 수도 있는데 자율신경계 이상으로 인한 것이라고 한다. 나는 지난 4월 오미크론이 우세종일 때 코로나19에 걸렸고 최근 다른 일로 병원에 갔다가 “코로나 후유증을 치료해드립니다”라는 배너의 맨 상단에 이 단어가 있는 것을 보면서 지금의 멍한 느낌이 코로나19 후유증이 아닐까 의심하게 됐다.

한윤정 전환연구자

한윤정 전환연구자

이런 이야기를 주변 사람에게 하면 반응은 대개 비슷하다. “원래 그런 거 아니야? 나도 그래”라는 것이다. 86세대,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책임이 많은 시기, MZ세대 트렌드에 밀려 자신이 지금 맞는 말을 하는 건지, 제대로 행동하는 건지, 감각이 어지러운 시기에 머릿속이 멍한 상태는 자연스러울지도 모른다. 또래 단톡방에는 ‘말하기 좋아하는 걸 소통이라 착각하지 마라’ ‘리액션 강요하지 마라’ ‘아무 농담이나 하지 마라’, 심지어 후회하지 마라’ 등의 가르침이 종종 공유된다.

그런데 브레인 포그가 개인의 뇌에 생긴 물리적 이상이나 갱년기 증상이 아니라 사회적 현상일지 모른다는 의심이 생겼다. 우선 코로나19 거리 두기가 가져온 후폭풍이다. 꼬박 2년의 비대면 시기를 넘어 대면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비대면의 심리상태를 좀처럼 벗어나기 어렵다. 넓은 야외공간에서도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불안한 마음이 생기는 것은 물론 사람을 만날 일이 생겨도 ‘굳이?’라는 자기검열이 먼저 작동한다. 줌과 구글미트, 메타버스에 익숙해진 탓이다. 생생한 현실감각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 더해 모든 일이 너무 빨리 진행된다. 순식간에 청와대가 개방되더니 미처 가볼 사이도 없이 베르사유 궁전 같은 문화·전시공간으로 바꾸겠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대학은 비대면 수업으로 인해 어느 곳보다 변화가 클 텐데 느닷없이 반도체가 대학과 관련된 주된 담론이 되었다. ‘검수완박’으로 인해 수사권이 강화된 경찰의 구조개편 작업 역시 속전속결로 이뤄졌다(경찰대 폐지까지 거론되는데 이는 경찰뿐 아니라 대학입시 문제이기도 하다). 모두 지난 몇 달간 벌어진 일들이다.

새 정부가 반생태적이라 느껴지는 것은 원자력발전 부흥 등 정책 뒤집기도 있지만 아찔한 속도감 때문이다. 법과 원칙을 앞세우는 것은 대화보다 속전속결로 밀어붙이겠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걸어가면서 몇 마디 던지는 대통령의 ‘출근길 문답(도어스테핑)’ 역시 소통이 아니라 건성으로 느껴진다. 일중독과 생산성 위주의 사회를 벗어나기 위한 수단이던 주 52시간 근로제를 되돌리려는 시도는 가장 강력한 시간강박증이다. 대통령 집무실 이전처럼 결과로 보여주기로 작정했다면 과정이 민주주의의 기본이라는 원칙을 망각한 것이다.

국회가 오랫동안 공전할 때 일하지 않는다는 비판이 많았다. 그러나 어떤 자료를 보니 국회의 문제는 일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너무 빨리 일하는 데 있었다. 지난 20대(2016~2020년) 국회의 법안 발의·제출 건수는 프랑스의 20배, 독일과 일본의 60배, 영국의 90배였으며 가결·반영 건수는 최소 2배(미국과의 비교)에서 최고 172배 (영국과의 비교)였다고 한다. 충분한 숙고와 토론, 조정 없이 일단 만들고 보는 것이 우리 국회의 일하는 방식이다. 잘 만들지 않으면 고치는 데 더 많은 힘이 든다는 걸 누구나 경험으로 안다.

속도를 늦추지 않으면 우리 사회의 미래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개발연대를 살아온 나 역시 효율성과 속도강박에 시달리기는 마찬가지다. 우리 세대의 주류는 ‘사당오락’, 4시간 자면 시험에 붙고 5시간 자면 떨어진다는 신념으로 학력고사를 치르고 대학에 입학해서 빠른 경제성장 덕분에 여기까지 온 이들이다. 수십 년간 ‘더 빨리, 더 많이’에 익숙해진 감각을 바꾸기는 어렵겠지만 한층 복잡하고 다양해진 사회는 느림이란 가치를 요구한다. 권위주의는 빠른 속도와 통한다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문제는 느리면서 생생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이다. 개인 차원에서는 생각을 버리고 몸을 많이 움직이는 게 해결책이다. 피로와 스트레스에서 비롯된 브레인 포그 치료법은 척추의 긴장을 풀고 면역력을 높이는 것, 열심히 운동하고 충분히 쉼으로써 혈액순환을 원활히 하는 것이라 한다. 이런 원리를 사회적으로 확대해보면, 지금부터라도 밀어붙이기를 중단하고 소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새 정부가 느리지만 성실한 대화를 시도하는 것만이 사회의 건강을 지키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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