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가장 먼 곳을 할퀴기

2022.08.18 03:00

“한 여자가 자기 삶의 진실을 말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세계는 터져버릴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랬겠지만 나도 이 유명한 시구로 미국의 여성 시인 뮤리엘 루카이저(1913~1980)를 처음 읽었다. 한국에서 미투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무렵 많은 여성들에게 자기 내부의 힘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저 짧은 시구보다 더 정확히 알려주는 문장이 있었을까. 멀리 흩어져 있던 작고 떨리는 목소리들이 하나로 모이는 데는 의외로 거창한 것이 필요하지 않다. 때로는 시구 하나가 그 역할을 한다. 내게도 그랬다.

인아영 문학평론가

인아영 문학평론가

작년 한국에 처음 번역된 루카이저의 1968년 시집 <어둠의 속도>(박선아 옮김, 봄날의책, 2021)를 읽고서야 이 긴 시의 제목이자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독일의 여성 판화가 케테 콜비츠임을 알았다. 1960~70년대 제2물결 페미니즘 시학과 반전 운동의 대표적 시인이었지만 오랫동안 잊혀왔던 루카이저는 19세기에 태어나 평생 가난한 노동자들의 고통을 흑백 판화로 그렸던 콜비츠를 불러내어 목소리를 부여한다. 그리하여 콜비츠의 거칠고 굵은 선은 루카이저의 부드럽고 아름다운 시어로 번역된다. “종국에는 삶에도 행복한 것들이 있습니다./ 당신은 왜 어두운 부분만 드러내나요?”라며 가난한 노동자들만을 그리는 작업에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에게 콜비츠는 말한다. “전 여기에 답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건 알아요―/ 노동하는 삶을/ 이해하려는 제 충동은/ 처음부터 연민이나 동정과는/ 관계가 없었습니다./ 저는 그저/ 노동자들의 삶이 아름답다고 느꼈습니다.”

시대도 국적도 장르도 다른 두 여성 예술가를 잇는 끈은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두 사람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닐까. 전쟁의 한복판에서 어두운 시대를 통과했고, 가장 가난하고 취약한 사람들의 고통에 귀 기울였다는 객관적인 공통점도 있겠지만 루카이저의 시집 <어둠의 속도>에는 그 이면의 시적인 원리가 있다. “새벽 한 시의 전복/ 이 나의 관심사다. 이런 순간 말이다./ 창틀에 팔꿈치를 대고 기대/ 도시를 느끼는 것./ 표준시간대 사이, 바다 사이, 심야의 뉴스 사이에서/ 모든 것의 만남, 전쟁, 꿈, 겨울밤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이제 어둠의 경계에서야/ 나는 달빛의 극단을 본다./ 홀로. 내 모든 희망은/ 너무 멀어 들리지도 않는, 한 현(弦)만큼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 세계의 절반만큼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 흩뿌려져 있다.”(‘새벽 한 시의 전복’)

어두운 바다와 깊은 밤 사이로, 달의 공전주기 4분의 1만큼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에게도, 달빛은 흩뿌려진다. 그리고 그 달빛을 따라 시인의 희망도, 수없이 따라붙는 파도처럼, 내달릴수록 더 크고 높아지는 파도처럼, 세계의 끝처럼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 흩뿌려진다. 1·2차 세계대전을 겪었던 루카이저는 끝없이 이어지는 전쟁에서, 끝없이 흘러가는 바다의 물결을 보고, 그것이 저 세계의 먼 해안까지 닿는 이미지를 상상한다.

시집 전체에 흐르는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바다의 이미지는 그저 시적 배경이 아니라 부서진 사람들을 연결하는 은유가 된다. 그렇게 19세기 독일의 판화가 콜비츠, 1960년대 미국의 시인 루카이저, 21세기 한국의 수많은 여성들은 서로에게 닿는다. “보통 사람의 마음은, 가장 멍청한 자인 양,/ 알고 있는 세계의 가장 먼 경계를 할퀸다.”(‘아우터 뱅크스’) 좋은 시가 하는 일은 그런 것이다. 바다를 건너고 시간을 뛰어넘는 것. 그리하여 세계의 가장 먼 곳을 할퀴는 것. 결국 가장자리에 흩어진 부서진 것들을 하나로 모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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