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라는 괴물에 등을 보이지 말자

2022.11.15 03:00 입력 2022.11.15 03:03 수정

요즘 기사를 보기 힘들어 아예 눈과 귀를 막는다는 분들이 주변에 많다. 10·29 참사에 관한 기사들마다 감정을 쉽게 주체하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우선 나부터도 그러하고 주변의 학생들 또한 다르지 않다.

김관욱 덕성여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김관욱 덕성여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특히, 참사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관계자들의 발언을 들을 때마다 더욱 심해지는 듯하다. 그들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없기에 답답한 마음은 더욱 커져만 갔다. 그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기사들로부터 나를 보호하게 되는 것 같았다.

물론 정부에 맞서 참사에 대한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및 재발 방지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시민추모 촛불 제안’을 기획하는 시민들의 기자회견도 지난주에 있었다. 그렇지만, 적지 않은 시민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일 수도 있다. 내 질문은 그 슬픔과 충격이 얼마나 진지하게 한국 사회에서 받아들여지고 있을까다. 혹시 혐오가 덧씌워진 대책들 앞에 더 큰 상처를 받고 싶지 않아 등을 돌린 채 일상으로 회귀한 사람들이 대다수는 아닐까 우려스럽다.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덮어둔 채 말이다.

2001년 미국 세계무역센터에 9·11테러가 발생하고 열흘 뒤인 21일에 프랑스 툴루즈시에서 화학공장이 폭발했다. 가옥 1만채가 완파되고 공장에서만 그 즉시 20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시민들은 모두 9·11테러의 충격이 채 가시지도 않은 상태에서 공포에 휩싸였다. 프랑스 의료인류학자 디디에 파생과 리샤르 레스만은 바로 이 시기에 프랑스 사회가 트라우마 개념을 공유하는 광범위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 소위 ‘인류학적 변화’가 발생했다고 보았다.

더 나아가 정신의학(전문가들)이 정신적 고통을 독점해서는 안 되고 여러 전문가가 참여하는 ‘피해학’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당연히 충격의 정도에 상관없이 시민들은 즉각적으로 트라우마를 인정받고 임상적 확진과 상관없이 인정과 보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현재 한국의 상황은 어떠한가. 몇 번의 참사가 발생했지만 프랑스와 같은 전환기를 맞고 있는가. ‘진짜’ 책임자는 없고 희생양만 찾는 똑같은 매뉴얼 속에 시민들의 트라우마는 사회적 논의조차 되지 않는 듯하다. 문제는 그러는 사이 시민들은 각자도생의 삶을 견뎌내야 한다는 것이다.

혐오의 얼굴과 말로부터 등을 돌리고 안전거리를 유지하려 한다. 적어도 내 주변에서는, 특히 젊은 학생들의 경우 더욱 그러해 보인다. 보름이 지난 시점 대학캠퍼스 안은 싸늘해진 날씨와 함께 고요하다.

하지만 나는 10·29 참사가 4·16 참사와 함께 한국의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하나의 ‘문화적 트라우마’로 남을까봐 깊이 우려된다. 미국 사회학자 닐 스멜서는 문화적 트라우마를 그 사회의 존속을 위협하거나 “문화적 근본 전체를 침해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기억”이라 설명한다.

이미 공정담론 속에 개인의 능력에 따른 차별과 혐오가 팽배한 현실에서 연이은 참사로 인해 생명에 대한 위협과 죽음에 대한 무책임, 그리고 조롱 섞인 대응을 보며 한국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이 트라우마처럼 남는 것은 아닐까 걱정된다.

최근 영국 신경과 전문의 수잰 오설리번은 2015·2016년 스웨덴 난민 아이들 169명이 1년 안팎의 기간에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소위 ‘체념증후군’이라는 집단적인 기능성 신경장애 현상에 대해 소개했다. 이것은 난민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고국으로 돌아갈 위기(즉, 생명에 대한 위협)에 직면한 아이들 사이에서 발생한 현상이었다. 그것은 한 소년의 증언에 따르면, “깊은 바닷속에서 깨지기 쉬운 유리 상자 안에 들어가 있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유리가 산산조각이 나서 “물이 쏟아져 들어와서 저를 집어삼킬 것” 같았다고 말이다.

나는 한국에서 이미 다른 양상의 체념증후군이 존재한다고 느껴진다. 부당한 과로 업무에 아침에 눈을 뜨기가 무서워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직장인들이 있지 않은가.

한국이라는 혐오의 바닷속에서 본능적으로 찾아낸 안전지대는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로그아웃을 택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잠을 잔다고, 혹은 잠시 의식을 잃는다고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니 오히려 더 큰 혐오로 백래시될 것임을 확신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 그러한 확신이 문화적 트라우마로 확산되지 않도록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이다. 혐오에 등을 돌린 채 각자도생의 길을 찾는 게 아니라 그 등을 서로가 기댈 수 있는 지지대로 활용하며 혐오와 마주 서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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