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총리님, 얼마나 아파야 쉴 수 있죠

2024.05.06 20:11 입력 2024.05.06 20:15 수정

얼마나 아프면 일을 하지 않고 유급휴가, 병가를 받을 수 있을까. 모든 직장인들의 고민일 게다. 관련해서 지난 4월19일 영국 총리 리시 수낵은 ‘시크 노트 컬처’(sick note culture)를 문제시하며 개혁을 선언해 논란이 일고 있다. 여기서 시크 노트란 의사가 발행하는 일종의 병가진단서를 의미한다. 수낵 총리는 영국에서 ‘일상적인 어려움과 걱정거리’가 지나치게 의료화되고 있고, 병가진단서가 일반의사에 의해 남발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즉, 정신적 질환으로 보기 어려운 평범한 증상을 지나치게 질병으로 인정해줘서 기업의 생산성이 저하되고, 정부의 보건의료 지출이 증가한다고 비판한 것이다. 그 대안으로 시크 노트를 일반의사가 아닌 보다 제한된 특수한 전문가에 의해 발급될 수 있도록 개혁하려 한다.

수낵 총리의 핵심 논리를 그대로 옮겨보자. “우리는 시크 노트 자체를 변화시킬 필요가 없으며, 단지 시크 노트 문화를 변화시켜야 한다. 이를 통해 디폴트는 당신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냐이지 할 수 없냐가 아니다.” 그는 영국에서 팬데믹 이후 장기간 병가자들이 증가하고 있고, 특히 208만명의 시민들이 대부분 정신적 어려움을 호소하며 ‘경제적으로 비활동적’이라고 지적한다. 절대로 아픔을 경시해서는 안 되지만, 지나친 병가진단서 남용에 대해서는 좀 더 솔직해져야 한다고 꼬집는다. 결국, 일해야 되는데 아프다고 쉬려는 사람보다는 아프지만 일하려 하는 사람을 더욱 선호하는 ‘문화’로 선회하자는 선언인 셈이다.

이와 같은 총리의 발언이 나온 직후 영국 안에서 여러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우선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아픈데도 불구하고 상사의 눈치를 보며 참고 일을 하는, 이른바 프리젠티즘(presenteeism) 상황을 꼬집는다. 그다음으로 정신적 어려움의 경우 당사자도 모른 채 병을 키울 수 있는데, 총리가 그러한 어려움을 일상적인 걱정거리 수준으로 폄하하고 정신질환이 과다하게 진단되고 있다고 평가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지적이다. 물론 영국의 경제 및 재정 상황을 고려하고, 제한된 자원 안에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해온 영국 공리주의의 오랜 전통 안에서 본다면 수낵 총리의 발언도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하지만 그가 ‘문화’를 운운하며 노동자의 병가진단서를 문제시한 것은 어떤 식으로 해석을 하더라도 오류가 있다. 왜냐하면 문화란 기본적으로 특정한 집단이 ‘학습하고, 공유한 생활양식의 총체’를 가리킨다. 만일 수낵 총리의 지적이 맞다면, 영국 국민 모두가 ‘꾀병’으로 일을 기피하는 습성을 학습하고 공유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에 대해 만일 총리가 자신의 주장은 몇몇 소수의 부도덕에 대해 지적한 것이라고 반론을 한다면, 이 또한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 소수의 사람 중 정말로 아파서 진단을 받은 환자와, 또 그러한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진단서를 발부한 의사들까지 여론몰이에 의해 부도덕한 사람으로 낙인찍는 잘못을 저지른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석을 하든 총리의 ‘병가진단서 문화’에 대한 공식적 담화는 그 자체로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이처럼 ‘문화’라는 말은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되는 단어다. 특히 총리의 위치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그리고 그러한 논리의 밑바탕에 경제적 셈법이 깊게 자리잡고 있다는 말이다. 최근 영국에는 국가보건서비스의 재정 악화를 해결하기 위해 의사를 보지 않고도 여러 질병들(편도선염, 방광염 등)에 대해서 약국에서 쉽게 무료로 약을 제공받을 수 있게 정책이 시행되고 있다. 놀라운 것은 ‘무료 사후피임약’까지 약국에서 요구하면 바로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영국의 관계자는 이것이 여성의 재생산 결정권 차원의 문제라기보다는 임신 및 출산, 육아 및 교육, 그리고 주거 등에 대한 정부의 재정지출을 줄이기 위한 대안으로 해석한다. 수낵 총리가 꾀병 ‘문화’ 운운하며 감추려 한 진실은 바로 이것이며, 오히려 이 같은 해결 방식 자체가 영국의 정치적 ‘문화’로 자리잡은 건 아닌지 의문이다.

한국에서도 아파도 일을 해야만 하는 프리젠티즘 논란은 끊이지 않는다. 정말 누구의 도덕적 해이일까. 이런 상황에서 만일 한국의 지도자가 프리젠티즘의 의미를 조금만 뒤틀어 문화라는 이름표를 붙이게 된다면 어떠할까. 예를 들면, 아파서 제대로 일을 할 수 없는데도 출근해서 시간만 보내는 문화가 만연했다고 비판한다면 말이다. 그 해답은 조만간 영국에서 엿볼 수 있겠지만, 시민에게 ‘말’로서 상처만 남기고, 실효성 없는 ‘말’뿐인 정책만 남을 가능성이 커 보이는 것은 왜일까. 어찌 보면, 이런 기대가 진짜 문화이지 않을까 싶다.

김관욱 덕성여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김관욱 덕성여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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