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는 과거와 어떻게 대화?

2023.01.12 03:00 입력 2023.01.12 03:04 수정

10년에 걸쳐 박사논문을 쓰고 뵌 친척 어른이 이런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다. 당신은 역사학은 학문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다 나온 사료 가지고 똑같은 소리 하는 게 무슨 학문이냐는 말씀이었다. 그러면서 역사학은 사회적 효용이 없다는 말씀까지 하셨다. ‘효용’ 같은 단어를 좋아하는 전공을 하신 분이었다. E H 카의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 같은 유명한 말만 곱씹어봤어도 역사학자가 똑같은 소리를 한다는 얘기는 안 하실 텐데 싶었지만, 어떻게 보면 역사학자가 하는 일을 잘 알지 못해서 하는 얘기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장지연 대전대 H-LAC대학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장지연 대전대 H-LAC대학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역사학자가 과거와 끊임없는 대화를 한다는 건, 현재의 경험을 통해 과거 사료를 발견하고 해석하며 의미를 부여한다는 뜻이다. 이러다 보면 똑같은 사료가 역사가의 경험에 따라 다르게 읽히기도 한다. 경복궁 근정전의 이름 지은 내력을 풀이한 정도전의 글이 나에게 그러했다. ‘천하의 일이 부지런하면 다스려지고, 게으르면 망하는 것은 필연적입니다’로 시작하는 이 글은 임금이 정치에 부지런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2008년, 처음 이 사료를 가지고 논문을 쓰고 난 다음에는 임금이 부지런한데도 정치가 나빠지는 경우에 대한 설명에 눈이 갔다. 정도전은 임금이 아래 사람 일까지 한답시고 부지런을 떨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그것은 임금의 일이 아닐뿐더러 까탈만 부리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이 논문을 쓰던 시절의 대통령은 고속도로 감시카메라를 보면서 나무 두 그루를 뽑으라는 지시까지 하던 사람이었다. 2017년, 책을 쓰면서 다시 사료를 봤다. 이번엔 전체 글에서 임금이 게으르면 안 되고 모름지기 부지런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이건 정도전이 임금이 쓸데없이 부지런할까 걱정하기보다는 게으를까 봐 훨씬 더 걱정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아, 그래. 정도전의 시대라면 지도자가 쓸데없이 부지런할 걱정보다는 부지런하지 않을 경우에 대한 걱정이 더 컸겠다 싶었다. 일단 부지런하긴 해야 제대로 부지런한지 가늠이라도 해볼 것이 아닌가. 시대를 앞서 주 4일 근무를 실천하던 대통령을 가져보니 그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

그러다 작년 말, 강연 자료를 만들려고 사료를 옮기다 전혀 새로운 부분에 눈이 갔다. 임금이 편안한 걸 좋아하면 교만하고 게을러지기 쉽고, 그러면 아첨꾼이 “이미 높은 자리에 있는데 어찌 수고를 해야 합니까?”라며 임금을 꼬드길 것이라는 부분이었다. 그렇지. 권력자 주변에는 그가 좋아하는 것을 더 좋아하게 만드는 사람이 모이기 마련이다. 교만하고 게으른 지도자 곁에는 당연히 이런 인간이 꼬여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303자밖에 안 되는 이 짧은 사료가 어쩜 이렇게 볼 때마다 새롭게 읽힐까. 이런 것이 역사가의 현재를 통해 과거가 끊임없이 재발견되고 해석되는 과정이다. 그러나 역사가의 대화는 이렇게 새롭게 읽는 게 다가 아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역사가가 일방적으로 과거의 아무 데나 밑줄을 긋는 작업은 아니라는 의미다. 사실 과거는 대화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 그렇기에 역사가는 과거의 진정한 목소리를 최대한 들어보려고 신중하고 겸허하게 사료를 탐색한다. 정도전은 임금의 부지런함을 소재로 다양한 이야기를 했지만, 그 이야기의 진정한 목적은 부지런함이라는 소재를 통해 태조 왕건이라는 고려 475년의 상징을 해체하고 고대의 성인 군주를 새 시대의 모범으로 제시하는 데 있었다. 여기에 밑줄을 긋기까지 고려 초부터 사료를 훑고 인용문의 출전을 찾으며 글의 맥락을 더듬는, 고단하고 지난한 작업을 수행했다. 이런 작업이 바로 역사학이 학문으로서의 엄정함을 유지하는 지점이다. 사료 아무 데나 밑줄 긋는 것은 역사학이 아니다. 친척 어른이 역사학의 이런 역동성과 엄정함을 언젠가 이해하시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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