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감함과 다정함의 차이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 변치 않는 가치가 있다고 하면 그건 아마도 ‘동정’일 것이다. 다른 존재와 같은 정이 된다, 라는 뜻을 가진 이 단어가 우리 사회를 지탱해 오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우리가 타인을 돕는 이유도 단순히 누군가를 불쌍히 여겨서가 아니라 내가, 나의 아이가, 저런 상황이 된다면 어떨까, 하는 데서 나온다. 그만큼 누군가의 마음이 되어보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한 사람들을 보고 다정하다거나 다감하다고 말한다. 다정함, 다감함, 동정, 이러한 단어들은 모두 비슷해 보이지만 다르고 그러면서도 서로 연결되어 있다. 나름의 기준으로 이 단어들을 정리해 두고 싶다.

김민섭 사회문화평론가

김민섭 사회문화평론가

사실, 하나의 언어를 확실히 해두고 싶은 사람들도 있는 법이다. 말장난처럼 보일지라도 숫자보다 언어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숫자의 공식보다는 말을 조감하는 데 관심을 가졌다. 예를 들면 혼자서 말놀이를 자주했다. 한 음절의 띄어쓰기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하는. “네 그 맘 내 참 잘 알 듯.” 아니면 띄어쓸 때마다 한 음절씩 늘어나는 문장을 쓰는. “나 정말 너만을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사랑했으니까.” 이런 사람은 나밖에 없겠지, 싶었는데, 언젠가 만난 누군가가 혼자 있을 때 저는 이러고 많이 놀아요, 라고 말해서 그도 나도 뭐 이런 사람이 있지, 하고 서로를 바라본 기억이 있다.

다시 돌아와서, 동정하는 사람이 되려면 다감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타인의 마음이 되어보는 일에도 연습이 필요하다. 스스로 여러 개의 감정의 페르소나를 써 보는 경험을 부단히 해 나갈 때 비로소 타인의 마음과 닿을 수 있다. 그러하지 않으면 타인의 마음이 되어보고자 하다가도 결국 서로는 다른 사람이구나, 나는 당신을 이해할 수 없다, 라는 결론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 어떻게 그런 연습을 할 수 있을까. 누군가는 태어날 때부터 그런 사람이겠으나 흔치 않을 것이고, 누군가는 배워서 그런 사람이 되겠으나 역시 어려울 것이고, 누군가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간신히 그런 사람이 될 것이고, 누군가는 어떤 상황에서도 그런 사람이 되는 일을 거부하기도 할 것이다. 결국 이 역시 지능의 영역이다. 습득해 나가며 현명함, 지혜로움, 영리함에 다다르는 것이다. 나는 그다지 현명한 사람은 아니어서 몇 가지 경험을 통해 그러한 삶을 지향하는 게 옳다는 태도를 가지게 됐다.

다감한 사람이 되는 연습을 선행할 때, 우리는 다정한 사람이 될 수 있다. 다정은 주변의 모든 존재에게 자신의 정을 보낸다는 뜻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단 한 사람에게, 자신의 가족에게, 친구에게, 필요한 사람에게만 정을 주고자 노력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한 사람에게만 정을 주는 사람을 다정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런 선택적 동정을 우리는 이기주의라고도 말한다. 물론 애인에게만 주어야 할 애틋한 정이라는 것도 있겠으나, 우리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 라는 데서는 다정함의 가치가 피어오르기 어렵다.

얼마 전 보았던 드라마 <재벌집 막내 아들>에서 주인공 진도준은 자신의 할아버지 재벌 진양철에게 주식 가격이 폭락하여 피해를 본 서민들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그때 진양철은 답한다. “도준이 네가 그 사람들 걱정을 왜 하노. 니는 평생 그래 살 일이 없다. 내 손자니까.” 진도준은 전생에 그 당사자였기에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다. 그가 타인을 순수하게 동정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우리는 동정의 범위를 넓히기 위해 애써야 한다. 학연, 지연, 혈연을 넘어, 숫자와 브랜드가 같은 사람들에게 한정적으로 더욱 다정과 친절을 보내는 요즘이다. 그러나 내가 마음을 보내야 할 대상은 어디에나 있다. 다감한 사람이 되고, 그것을 바탕으로 타인을 동정하고, 그것으로 다정한 사람이 되고자 할 때, 우리는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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