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

2023.04.05 03:00
안호기 사회경제연구원장

놀랄 만한 뉴스가 없는 날이 없다. 주말 곳곳에서 발생한 산불이 두려움을 주더니, 월요일부터는 국제유가 급등 소식이 다소 잦아들던 인플레이션 불씨를 살렸다. 앞서 글로벌 은행 크레디트스위스(CS)가 유동성 위기를 겪다가 다른 회사에 넘어갔고, 도이체방크도 위기설이 증폭되고 있다.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그 여파는 한국에 고스란히 전해져 금융시장을 흔들었다. 도처에 ‘시한폭탄’이 도사리고 있다.

안호기 사회경제연구원장

안호기 사회경제연구원장

신문 기사에는 폭탄과 같은 군사 용어 사용을 자제하려고 하는데, 언제부터인가 흔한 용어가 됐다. 인터넷 포털 네이버에서 4일 오후 ‘폭탄’으로 뉴스를 검색하니 1일간 올라온 관련 기사만 200건가량이었다. 세금·난방비·문자·분담금·할인·부동산 PF·역전세·공급·갭투자·범칙금·부실 등 폭탄 종류도 다양하다.

서울 인왕산 인근 주민들은 지난 2일 발생한 산불에 대해 40여년 만에 처음이라며 놀랐다고 한다. 이날 전국에서 34건의 산불이 발생했다. 이는 역대 세 번째 기록이다. 올해 들어 전국에서 발생한 산불은 평년에 비해 50% 이상 많다. 최근 지속된 건조한 날씨 탓으로, 기후변화의 단면을 보여준다. 한국뿐 아니라 지구 전체가 겪는 현상이다.

지구 환경과 경제 현장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 난무하고 있다. 서구 학자들은 현재 지배적 경제 시스템인 자본주의가 한계에 이르러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고 지적한다. 자본을 확대재생산해 이익을 늘려가며 성장하는 자본주의는 무분별한 채굴로 지구 천연자원 고갈을 초래한다. 화석연료를 비롯한 자원의 채굴과 사용을 줄이지 못하면 인류는 조만간 생사 기로에 놓일 수밖에 없다.

탄소를 내뿜는 내연기관 자동차를 한결 환경친화적인 전기차로 바꾸는 등 기술혁신이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일부는 주장한다. 재생에너지와 탄소 저감 등 친환경 기술에 대대적으로 투자하는 ‘그린 뉴딜’이 한 예다. 그러나 성장을 전제로 한 그린 뉴딜은 자본가에게 새로운 이익 추구의 기회가 될 뿐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지금까지 과정을 보면 기후변화는 기술혁신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지구를 망치고 있다. 영국 환경경제학자 팀 잭슨은 <성장 없는 번영>에서 “자본주의 아래에서 진행되는 기술혁신이 기후변화를 멈춰줄 것이라는 단순한 상정은 환상일 뿐”이라고 단언했다.

‘자본주의의 꽃’이라는 금융은 증식을 거듭하는 괴물이다. 한국 국내총생산(GDP)은 1990년 200조원에서 2021년 2072조원으로 10배가량 늘었다. 반면 금융시장 규모는 같은 기간 158조원에서 5662조원으로 36배 급증했다. 2004년 서울에서 30평대 아파트 한 채를 마련하려면 노동자 월급 18년치를 고스란히 모아야 했다. 지난해에는 36년치로 늘었는데, 이는 금융시장 확대에 따른 자산거품 영향과 무관치 않다.

과거 금융은 실물경제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해 산업의 혈맥으로 불렸다. 지금은 각종 파생상품으로 이익을 최대화하는 수단으로 변질됐다. 투자기회 확대라는 명분이 있지만, 금융을 통해 늘어나는 부는 대부분 거대 자산가에게 돌아갈 뿐이다. 일부 글로벌 은행이 위기에 처하는 것은 일이 터지기 전까지는 실타래처럼 얽힌 금융상품의 복잡한 구조가 얼마나 위험한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서구에서 탈성장과 새로운 경제체제 논의가 활발한 것은 성장이 정점을 지나 갈수록 자본주의 모순이 불거지기 때문이다.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칼럼집 <사회주의 시급하다>에서 자본주의가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지구 자원을 고갈시키고 있다고 진단했다. 피케티는 자본주의를 극복할 새 방식으로 “참여적이고 지방 분권화된, 연방제 방식이며 민주적이고, 또 환경친화적이고 다양한 문화가 혼종돼 있으며, 여성 존중의 사상을 담은 사회주의”를 제시했다.

유엔은 2021년 한국을 선진국으로 공식 인정했다. 최근 50년간 지구상에서 한국만큼 빠른 속도로 성장한 ‘자본주의 모범 사례’는 없다. 환경오염과 불평등 심화 속도도 그만큼 빨랐다. 하지만 앞으로도 성장을 지속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경제를 떠받쳤던 수출은 지난달까지 6개월 연속 감소했고, 13개월째 무역적자가 이어지고 있다. 게다가 급격한 인구 감소와 주력 산업 침체 등 성장동력마저 약화하고 있다. 한국도 이미 성장의 정점을 지나고 있는지 모른다. 성장 없이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포스트 자본주의에 대한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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