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에 관해 말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 질문을 던지기 훨씬 전부터 나는 가족 이야기를 쓰고 있었다. 고등학생 때 매주 제출했던 수필 원고에도 가족은 어김없이 등장한다. 왜냐고 묻는다면 일단은 나랑 먼 이야기를 지어내는 법을 몰라서였다. 어째서 <나니아 연대기>나 <왕좌의 게임> 같은 서사는 내 안에 씨앗조차 없는지 한탄스러웠다. 하지만 나를 키운 어른들에겐 재미있는 면이 아주 많았다. 안 쓰기엔 너무 웃겼다. 웃긴 만큼 눈물겹기도 했다. 가까이 사는 이들이 마침 흥미로웠으므로 별수 없이 그들을 보며 받아적었다. 평이했던 문장(우리 엄마는 털털하다)에 시간이 흐르면서 유머와 거리감이 생겼고(퇴근한 복희는 자신이 하루 종일 신었던 양말 냄새를 꼭 맡아본다) 내가 자란 부품 상가 골목의 대가족을 조망하는 첫 문장(태어나보니 주변엔 온통 상인들뿐이었습니다)도 쓰여졌다.

이슬아 ‘일간 이슬아’ 발행인·헤엄출판사 대표

이슬아 ‘일간 이슬아’ 발행인·헤엄출판사 대표

솔직함과 탁월함은 무관하다

애증의 대상인 가족을 서사화하는 작업엔 분명히 까다롭고 아슬아슬한 데가 있었다. 집집마다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기 마련이니까. 과장과 축소, 그리고 적절한 생략은 불가피했다. 내 가족 이야기를 10년쯤 거듭하여 새로 쓰고 각색하던 중 쑥쑥 자라난 소설이 <가녀장의 시대>다. 이야기의 재료가 자기 인생임을 숨길 생각이 없는 작가들에겐 솔직하다는 평이 따르지만 그것은 루머에 가깝다 .

‘경험한 것만 쓴다’는 말로 널리 알려진 아니 에르노는 단연코 이 분야의 거장이다. 그러나 경험한 것만 쓴 글 중 형편없는 예시를 우리는 얼마든지 떠올릴 수 있다. 내가 아니 에르노에게 빠져든 건 솔직함이나 파격 때문이 아니라 그가 자기 인생과의 거리를 자유자재로 조절하기 때문이었다. 겪은 일을 현미경으로도 관찰하고 망원경으로도 관찰하는 특유의 시선은 책에서는 물론 다큐멘터리 영화에서도 드러난다.

올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상영한 <슈퍼 에이트 시절>은 아니 에르노와 그의 아들 다비드 에르노가 공동 연출한 작품이다. 1970년대에 30대였던 에르노 부부의 카메라에 담긴 영상들이 다큐멘터리 재료다. 둘 중 카메라를 쥐는 건 남편인 필립 에르노만 누린 특권이었다. 아니 에르노와 두 아들의 모습이 그에 의해 찍혔다. 신혼 초의 에르노, 자식들을 아끼고 집안을 돌보는 에르노, 한 번뿐인 사건들 속에서 행복한 에르노, 그러나 글을 쓰지 못해서 초조한 에르노를 젊은 남편의 눈으로 본다. 에르노는 “책 한 권으로는 바라는 만큼 인생이 달라지지 않”음을 깨닫고 계속해서 다음 소설을 쓰며 나이 들어간다. 쓰면 쓸수록 남편과의 거리는 멀어지고 에르노가 화면 속에 등장하는 장면은 줄어든다.

이혼 후 남편은 에르노에게 양육권과 그간의 촬영본 전부를 남겼다. 에르노가 촬영본을 다시 꺼내든 것은 긴 세월이 흐른 뒤다. 어느새 남편이 죽고 없는 세상에서 재생하는 오래된 비디오. 믿을 수 없이 어려서 생경한 자신들과 당시로써는 알 수 없었던 진실들이 눈부시게 나타난다. 시간이 주는 거리감 때문이다. 에르노는 그 시절 영상을 편집하기 시작한다. 이제 그는 응시받는 자일 뿐 아니라 응시하는 자다. 시선의 권력을 지닌 채로 지난날을 증언하자 남편의 기록만으로는 짐작할 수 없었던 내면이 수면 위에 떠오른다. 휴양지에서 담담하게 아이들을 챙기는 듯한 영상 속 에르노를 보며, 영상 바깥의 나이 든 에르노가 이렇게 덧붙인다. “나는 수영장 끝에 앉아 책상 서랍 안에 두고 온 완성된 원고를 생각했다. 개학 전까지 타이핑을 마쳐야 했다. 그게 구원이길 바랐지만 이유나 방법은 몰랐다.”

다큐멘터리 속 시간보다 먼 미래에서 들려오는 음성을 통해 관객들은 본다. 문학에 대한 열망과 격변하는 시대와 전통적인 성역할 사이에서 요동치던 여자의 눈동자를….

경험과 거리를 두는 훈련

훗날 에르노는 노벨 문학상 수상 연설에서 ‘나는’으로 시작되는 말하기가 필요했다고 고백한다. 감각을 포착하는 탐색 도구로서 1인칭을 활용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빅토르 위고는 ‘우리 중 누구도 자신만의 삶을 사는 영광을 누리지 못한다’고 썼으나 모든 사건은 개인적인 방식으로 냉혹하게 체험된다는 게 에르노의 생각이다. 다만 책 속의 ‘나는’ 어떤 식으로든 투명해진다면 독자의 ‘나는’도 그 자리에 들어올 수 있다고, 그렇게 1인칭은 보편에 도달한다고 에르노는 말한다.

주어를 바꿔가며 가족 이야기를 각색하는 방법을 나는 여전히 배우고 있다. 그새 가족들은 내 글에 영향을 미치고 내 글은 가족들에게 파장을 돌려준다. 에르노 다큐멘터리에 깃든 시간적 거리감이 모두에게 허락되진 않는다. 우리는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가기 전 여기서도 바라보고 저기서도 바라보는 수밖에 없다. 가장 잘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응시를 거듭하다보면 작가는 어느새 자신의 인생과 조금 멀찍이 서 있게 된다. 내가 아는 재미있는 이야기는 대부분 그 자리에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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