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와 칼

2023.11.12 16:29 입력 2023.11.12 23:11 수정

국민의힘이 이동관 방송통신위원장 탄핵안의 국회 본회의 표결을 막으려고 노란봉투법과 방송 3법 표결을 감수한 것은 이 위원장으로 상징되는 현 정부의 언론 장악 의지가 얼마나 확고한지 보여준다.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 선거 패배 이후 여권은 국정 기조의 전환을 합창 중이다. 윤 대통령은 ‘민생’과 ‘현장’을 강조하고, 정부는 총선용 포퓰리즘 정책을 쏟아낸다. 국민의힘은 요란하게 혁신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민생은 민생, 혁신은 혁신, 언론 장악은 언론 장악이라는 것을 ‘이동관 구하기’는 보여준다. 민생과 혁신이 총선용 당의정이라면 언론 장악은 이 정부의 기본 방향이다. 총선을 앞두고 포장지를 갈았을 뿐 국정운영 기조는 바뀌지 않은 것이다.

이동관 체제의 언론정책은 ‘찍어내기’와 ‘규제 강화’로 요약된다. 공영방송인 KBS와 MBC 경영진을 교체하려고 갖은 편법을 불사한다. 그나마 MBC 경영진 교체 시도는 법원에 제동이 걸렸지만 KBS 경영진 교체는 9부 능선을 넘었다. 방통위와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가짜뉴스를 때려잡겠다며 법적 근거도 없이 언론을 옥죈다.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 후 가장 많이 한 말은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윤 대통령이 말하는 자유에 ‘언론 자유’는 포함되지 않는 것 같다. 정부는 중대재해처벌법, 노란봉투법과 같은 노동친화적 법률(안)이나 감세 등 이슈에선 친시장과 규제 완화를 외치면서도 언론이나 집회·시위에는 글로벌 스탠더드에 아랑곳하지 않고 각종 규제 딱지를 붙인다. 검찰이나 방통위, 방심위가 문제 삼는 언론들 면면에서 보듯 규제 타깃은 현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이다. 윤 대통령의 ‘자유’가 그렇듯 ‘규제’도 선택적이다.

민주주의의 토대는 자유로운 공론 형성이고, 그 핵심은 언론 자유이다. 윤 대통령은 얼마 전까지 ‘공산전체주의’와 싸우는 전사를 자임했는데, 그 앞에 ‘공산’을 붙이건 ‘나치즘’을 붙이건 모든 전체주의의 제1 강령은 언론 통제다. 경성이냐 연성이냐, 불법이냐 적법성의 외양을 갖췄느냐, 비밀 경찰이나 정보기관에 끌려가느냐, 검찰에 불려가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기자들이 기사 때문에 수시로 압수수색을 당하는 사회가 정상은 아니다. 언제 휴대전화가 털릴지 몰라 내밀한 사적 영역에서조차 스스로 발언을 검열하고 쉬쉬하는 사회를 민주주의 사회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전후 일본의 대표적 지식인으로 꼽히는 가토 슈이치는 프라하의 봄을 현장에서 목격하고 ‘언어와 탱크’라는 글을 썼다. 한 대목을 인용한다.

“언어는 아무리 날카로워도, 또한 아무리 많은 이들의 목소리가 되어도 한 대의 탱크조차 파괴하지 못한다. 탱크는 모든 목소리를 침묵하게 만들 수 있고 프라하 전체를 파괴할 수도 있다. 하지만 프라하 길거리에 있는 탱크의 존재, 그 자체를 스스로 정당화하는 일만은 불가능할 것이다. (…) 1968년 여름, 보슬비에 젖은 프라하 거리에서 마주 서 있던 것은 압도적이지만 무력한 탱크와 무력하지만 압도적인 언어였다.”

프라하의 봄 당시와 지금 한국 상황은 다르다. 공론장은 쪼개졌고, 언어는 압도적이지 않다. 상업주의와 진영주의에 찌든 언론이 자초한 면이 클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압도적이지만 무력한 탱크와 무력하지만 압도적인 언어’라는 감동적인 대비가 울림이 없는 건 아니다. ‘무력하지만 압도적인 언어’는 언론의 꿈이자 궁극적 지향이며, 길을 잃고 헤맬 때 가야 할 길을 안내하는 밤하늘의 별자리, 두려움에 뒤척일 때 용기를 북돋아주는 마음속 촛불과 같기 때문이다.

‘무력하지만 압도적인 언어’는 어떻게 가능한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 ‘후손들에게’의 한 대목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알게 되었다./ 비천함에 대한 증오조차/ 표정을 일그러뜨린다는 것을./ 불의에 대한 분노조차/ 목소리를 쉬게 한다는 것을./ 아, 우리는/ 우애를 위한 터전을 마련하고자 했지만/ 우리 스스로 우애롭지 못했다.” 브레히트는 “마침내 사람이 사람을 도와주는/ 그런 세상을 맞이하거든/ 관용하는 마음으로/ 우리를 생각해다오”라고 후손들에게 당부했지만, 보편적 가치를 위한 싸움은 싸움의 방식도, 싸우는 자의 태도도 달라야 한다.

적을 닮는 순간 그 싸움은 지는 것이다. 사익에는 공익으로, 정파성에는 보편타당성으로, 거짓에는 사실로, 감정에는 이성으로, 천박에는 품격으로 대응하는 것 말고 달리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을 무기력하다고 여긴다면 우리가 언론 자유와 민주주의에 거는 기대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정제혁 사회부장

정제혁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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