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보라

2023.11.22 20:30 입력 2023.11.22 20:38 수정

흩날리던 눈송이가 눈보라로 변했다. 허겁지겁 움직이는 와이퍼가 감당 못할 기세였다. 고속도로를 달리던 차들이 비상등을 켜고 속도를 줄였다. 11월 중순의 폭설이었다. 그는 트럭 안 어딘가에 스노체인이 있는지 머릿속을 뒤져 보았다.

눈과 바람은 쉬이 잦아들지 않았고, 차들은 가다 서다 하면서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트럭 안은 고요했다. 김 서린 유리창과 함께 몽롱해지는 의식을 다잡으려 그는 어디로 몇시까지 가야 하는지 떠올려 보았다. 목적지도 시간도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잠이 모자란 탓인가. 어젯밤에도 휴게실에 차를 세우고 두 시간 남짓 눈을 붙였다. 그는 집에서 나온 지 며칠째인지 헤아려 보았다.

퍼붓는 눈발 속에 도로를 가득 메우고 있는 차들을 바라보았다. 모두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는 화물을 싣지 않은 차들이 왜 굳이 도로를 달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뒤에 실린 짐이 없다면, 그 짐을 목적지까지 실어 날라야 한다는 약속이 없다면, 그것으로 돈을 벌어 트럭 할부금을 갚고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하지 않는다면, 그는 당장이라도 운전대를 놓고 차에서 내릴 것이다. 끼니를 때우고 용변을 해결하기 위해 땅을 밟는 시간은 모두 합쳐도 하루에 한두 시간이 되지 않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렀을 때, 그는 갑자기 깨달았다. 잠깐이라도 차에서 내려 땅을 딛을 기회가 바로 지금이라는 것을.

홀린 듯이 갓길에 차를 세웠다. 브레이크를 단단하게 채운 후에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눈 쌓인 도로 위에 서는 순간 어지럼증에 잠시 비틀거렸다. 지금 있는 곳이 어디쯤인지 주위를 살피다가, 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늘어서 있던 자동차들이 보이지 않았다. 주위에는 온통 흰옷 입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줄지어 남쪽을 향해 뜀박질하듯 걷고 있었다. 대열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는 그가 마치 돌이나 나무인 양 사람들은 눈길도 주지 않고 무심히 지나쳤다.

당신들 누구요? 곁을 스쳐 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었다. 우리는 도인들이라네. 도인이라니, 신종 데모꾼들인가, 생각하며 그는 다시 물었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거요? 남쪽으로 간다네.

갑오년에 추수를 끝내고 도인 수만명이 모였지. 모두가 하늘인 새 세상이 열린다기에 집에서 뛰쳐나왔고, 탐관오리를 몰아내자며 길을 떠났고, 임금이 제 나라 백성을 죽이려고 끌어들인 이웃 나라 군대와 맞서려 고향을 등졌다네. 승승장구 쳐 올라갔지. 관군과 왜군을 우금치에서 맞닥뜨렸어. 놈들은 산등성이를 방패 삼았지. 우리가 다가가면 일제히 총을 쏘고 숨었다가, 능선을 넘으려 하면 다시 총을 쏘아댔지. 그래도 오르고 또 올랐지. 주문을 외우면 죽음이 두렵지 않았거든.

싸움이란 하지 않는 게 가장 좋아. 기왕 싸웠다면 꼭 이겨야 하고. 아무리 기세가 좋아도 무기가 없으면 싸움에서 이길 수 없어. 도인들이 죽어 넘어져 온 산을 덮고 핏물이 강물이 되어 흐를 때, 왜군은 단 한 명도 죽지 않았어. 살아남은 도인들은 흩어지며 남쪽에서 다시 모이기로 기약했지. 우리는 논산 태인을 지나 순창을 거쳐 장흥 석대들까지 갔어. 그러는 동안 몸은 사라지고 주문을 외우던 넋만 남았지. 해마다 이맘때쯤 수만의 넋이 모여 우금치로 다시 쳐 올라간다네. 그러곤 이렇게 다시 후퇴하는 거야.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우리는 한 번도 우금치를 넘어본 적이 없네. 살아생전 넘지 못했기 때문이지. 자넨 거길 넘어봤는가?

등줄기로 싸늘한 기운이 흘렀다. 그는 황급히 트럭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아침에 평택에서 짐을 싣고 출발해 공주 논산 전주를 거쳐 왔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다시 짐을 싣고 돌아갈 것이다. 몇년째 쳇바퀴 돌 듯 반복하는 일이었다.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그는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점심을 먹은 뒤 잠깐 눈을 붙인 터였다. 차 안에서 잠이 들면 언제나 졸면서 운전하는 꿈을 꾸었다. 그는 창밖에 흩날리는 흰 눈송이를 오래 바라보았다.

부희령 소설가·번역가

부희령 소설가·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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