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할매

2024.01.04 22:09 입력 2024.01.04 22:16 수정

[정지아의 할매 열전] 나의 첫 할매

내 할머니는 1900년생이다. 유관순 언니보다 두 살이 많다. 유관순 언니는 1919년에, 내 할머니는 1991년에 세상과 작별했다. 그러니까 할머니는 조선시대에 태어나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과 전쟁을 겪으며 환갑을 맞았고, 서울의 봄은 물론 88올림픽까지 목도했던 것이다. 이미 늙어 있어서 그랬나 내 눈에 할머니는 늙은 채로 더 이상은 늙지 않는 것 같았다. 할머니는 열세 살에 내 고향 반내골로 시집을 왔다. 순천에서 시집왔다고 순천떡(순천댁)이라 불렸다. 얼굴은 곱지 않았고, 지혜롭지도 않았고, 성정이 유달리 착하지도 않은, 지극히 평범한 아낙이었다. 딱 하나, 할머니에게 남다른 점이 있다면 맛깔나는 말솜씨였다.

나는 순천에서 고등학교에 다녔다. 주말이면 완행열차를 타고 집에 갔다. 그 열차로 통학하는 아이들도 적지 않았다. 청춘남녀들이 노상 만나는 통학열차는 연애의 온상이었는데, 서글프기도 하지, 나에게는 어떤 남학생도 말을 걸지 않았다. 곱지 않은 할머니의 얼굴을 유전자로 물려받은 덕이었을 게다. 구례구역에 내려 버스를 타고 터미널로 가면 내 고향 반내골 중간까지 가는 마지막 버스를 탈 수 있었다. 토요일마다 그 버스에서 할머니를 만났다. 그 무렵 할머니는 읍내에서 중학교에 다니는 내 사촌들과 살고 있었다. 할머니는 일찌감치 버스에 올라타 악착스레 내 자리까지 잡아놓고는 큰소리로 외쳤다. 아이 아가, 여그다, 여그! 철없던 나는 할머니의 고함이, 내게로 쏠리는 사람들의 시선이, 죽고 싶도록 창피했다. 그래서 그 자리에 앉지 않았다. 버스가 토금리 다리 앞에 멈춰 서면 반내골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다. 거기서부터 4㎞를 걸어야 반내골이었다. 중학교 저학년이던 조카는 길이 멀다고 간혹 투덜거렸다. 언젠가 할머니가 그랬다.

참말 멀제이? 나가 열셋에 가매 타고 시집오는디 가도가도 산중이드라. 그때는 신작로나 있었가니. 이런 산중에도 사램이 사는가, 우리 아배는 나를 와 이런 산중으로 보내는가, 하도 서러와서 대성통곡을 했어야. 월매나 울었능가 가매에서 내리는디 새색시 눈이 단추구멍이라고 사램들이 쑤근댐시로 웃어들 쌓드랑게. 나는 내를 몇 번이나 건너 가매 타고 왔는디, 느그 할배 기생첩은 무신 복잉가, 꽃가매 타고 신작로로 사뿐사뿐 왔어야. 한지공장 헌다고 전주 갔던 느그 할배가 그 많은 돈은 싹 날려불고 갖고 온 것이 딸랑 기생첩이여. 워떤 년이 넘의 서방을 후렸능가 낯짝이나 볼라고 빨래허다 말고 달레갔는디, 워매! 나넌 머리털 나고 그리 곱고 희컨 손은 첨 봤어야. 얼굴은 또 월매나 고왔다고. 고런 얼굴로 빵긋빵긋 웃으먼 나라도 환장허겄드랑게.

고등학교 시절 내내, 나는 토요일 오후마다 반내골까지 가는 한 시간 동안 할머니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었다. 증조할머니가 장에 다녀오는 길에 호환을 당했다는 것도, 증조할아버지가 1919년 남원으로 만세 부르러 갔다가 반주검이 되어 실려왔다는 것도, 삭힌 똥물을 먹고 겨우 살아났다는 것도, 뻥 뚫린 신작로로 걸핏하면 일본놈들이 들이닥쳐 밀주를 찾겠다며 집집마다 샅샅이 뒤졌다는 것도, 할머니가 시집올 때 가져온 순천의 어느 장인이 만든 유기그릇을 요강까지 야무지게 일본놈들이 빼앗아갔다는 것도, 토금리 다리에서 멀지 않은 길가에 반란군의 목 잘린 시신 네 구가 나뒹굴고 있었다는 것도, 그 반란군이 지나가고 난 뒤 반란군에게 고추장이며 된장 등속을 주었던 토금리 사람 서른 명이 군인에게 한날한시에 총살당했다는 것도, 노름만 하던 막내 삼촌이 형들에게 야단을 맞은 뒤 신작로로 달려 나가서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도, 나는 모두 할머니에게 들었다. 홀린 듯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느라 반내골까지 가는 길이 조금도 힘들지 않았다.

어쩌면 나를 소설가로 만든 건 할머니의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할머니의 이야기에는 할머니가 살아낸 한평생이, 그러니까 삼일운동, 여순사건, 한국전쟁 같은 역사가 모두 담겨 있었다. 역사는 막연한 추상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개개인의 눈물겨운 삶의 총체라는 것을, 나는 할머니를 통해 배웠다. 그러니까 우리는 한국전쟁이라는 케케묵은 단어를 말할 때, 전쟁의 시기를 온몸으로 겪어낸 사람들 하나하나의 비통함과 애달픔까지를 구체적으로 상상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나의 오늘도 언젠가는 막연한 추상으로만 남을 테니까.

정지아 소설가

정지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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