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찰나의 것

2024.02.14 20:26 입력 2024.02.14 20:27 수정

문화적 보릿고개를 맞아 몇편의 영화를 관람했다. 민환기 감독의 다큐영화 <길 위에 김대중>(2024)을 보며 김대중 전 대통령의 민주주의를 향한 꺾이지 않는 저항정신을 확인할 수 있었다. 1980년 5·18 이후 옥중의 김대중에게 당시 안기부가 미국행을 회유하는 희귀 영상자료 등이 퍽 인상적이었다. 영국 켄 로치 감독의 <나의 올드 오크>(2024)를 보며 누군가에게 ‘곁’을 내준다는 일이 생각 외로 힘이 세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연대, 저항, 용기’를 강조하는 80대 켄 로치 감독의 앵글에서 짙은 허무의 감정 같은 게 느껴지는 것 또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올리버 허머너스 감독의 <리빙: 어떤 인생>(2023)을 관람했다. 1950년대 영국 런던을 배경으로 한 영화 <리빙: 어떤 인생>은 자기 앞의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었다. 청년들은 세상과 불화하고, 노인들은 자기와 불화하는 우리나라에서 이 영화가 던져주는 메시지는 너무나 분명하다. ‘나’라는 사람은 누군가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 것인가를 제기하는 것이다.

흥미 있는 사실은 <리빙: 어떤 인생>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1910~1998)이 연출한 영화 <이키루(生きる)>(1952)를 리메이크한 작품이었다는 점이다. 내 취향은 오래전에 본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였다. 제목 ‘이키루’는 ‘살다’라는 뜻이다.

<이키루>의 주인공은 시청 시민과에 30년째 근무하는 50대 공무원이다. 어느 날 그는 위암 판정을 받은 후 자신의 공직 인생을 회의한다. 그리고 무엇인가 보람 있는 일을 하며 인생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그가 동네 놀이터를 지어달라는 주민들의 민원을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장면이 퍽 인상적이다. 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며 안 되는 이유 백 가지를 찾는 데에는 골몰하지만, 정작 가치 있는 일 하나를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단 한 가지 이유’가 필요하다는 점을 망각하려는 행정의 태도가 저절로 연상되었다.

결국, 주인공은 죽음을 맞는다. 자신이 만든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며 노래를 흥얼거리는 주인공의 모습이 아직 눈에 선하다. 영화는 어떻게 살까 하는 문제는 결국 어떻게 죽을까 하는 문제라는 점을 강력히 은유하는 듯했다. 극중 주인공이 부른 노래 ‘삶은 찰나의 것’은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정치가이자 시인인 로렌초 데 메디치가 쓴 시로 알려져 있다. 새해를 두 번 쇠는 이중과세(二重過歲)를 하면서 자기와 불화하며 내면이 초라한 사람이 되지는 말아야지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나는 누군가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자 하는지 생각한다. 메디치의 시는 무엇이 필요한지 잘 말해준다.

“소녀여, 빨리 사랑에 빠져라/ 그대의 입술이 아직 붉은색으로 빛날 때/ 그대의 사랑이 아직 식지 않았을 때/ 내일 일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니/ 삶은 찰나의 것// 소녀여, 빨리 사랑에 빠져라/ 그대의 머릿결이 아직 눈부시게 빛날 때/ 사랑의 불꽃이 아직 다하지 않았을 때/ 내일 일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니.”

삶은 찰나의 것이다. 나와 당신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내가 하는 말이 아니라 내가 하는 행동이 더 필요할 수 있다. 긴 겨울이 가고, 봄이 저만큼 성큼 오고 있다.

고영직 문학평론가

고영직 문학평론가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