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2주년이다. 2022년 2월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전쟁은 진행 중이지만, 우리가 알아 왔고 익숙하던 국제질서의 붕괴를 알리는 사건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지루하게 계속되는 전쟁 상황은 최근 우크라이나에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우크라이나 당국은 17일 러시아 군과 격전을 벌여 오던 동부 도네츠크주 아우디이우카에서 철수했다고 밝혔다. 전략적 요충지인 아우디이우카를 러시아가 장악한 것은 작년 5월 바흐무트를 점령한 후 거둔 최대의 전과로 평가된다.
전쟁이 장기화되며 국제사회의 지원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라 더욱 우려가 크다. 유럽연합은 작년 12월 500억유로 규모의 추가 지원에 합의했지만 상당 기간 우여곡절을 거친 결과였다. 미국의 경우 조 바이든 정부의 우크라이나 계속 지원을 위한 예산안이 상원에서는 통과되었지만 공화당이 다수당을 차지한 하원에서는 통과 여부나 시기 모두 불확실하다. 바이든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군이 물자 부족으로 아우디이우카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미국 의회가 행동하지 않은 결과라고 얘기했다.
현실주의 국제정치,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에 대한 반감,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정권의 부패 또는 무능, 기타 이유로 우크라이나의 항전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다시 커질 것 같다. 사실 러시아의 침공 초기부터 이런 반응이 예상외로 많아 놀랐다. 주권국가를 말살하려는 전쟁에 대해 항전하는 측의 태도를 문제 삼는 주장은 이해하기 어렵다. 현실주의에서 말하는 현실에는 강대국이 다른 나라에 대해 자신의 의지를 강요하는 고착된 구도만 포함되고 객관적 전력에서 밀리는 나라가 주어진 상황에 대처하고 전황을 바꾸는 현실은 포함되지 않는 것인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2022년 초 러시아의 침공이 임박한 시점에 서방 일각에서는 젤렌스키에게 망명정부를 권고하기도 했고, 러시아와 맞서는 상황을 우려한 나머지 우크라이나에 대한 직접적·적극적 지원을 주저했다. 이런 상황을 바꾼 것은 젤렌스키 그리고 국민의 항전 의지와 성과였다. 전쟁 직전만 해도 우크라이나가 며칠 버티지 못하고 러시아에 굴복할 것이라고 다들 예상했는데, 우크라이나의 항전이 지속되자 다른 나라들의 태도 역시 변하게 된 것이다.
올해 1월에 출간된 타임지의 국제 담당 기자 사이먼 슈스터의 책 <쇼맨>은 우크라이나의 전쟁 초기 대응에 관한 밀착 취재를 통해 이를 잘 설명한다. 책의 제목 ‘쇼맨’은 물론 젤렌스키를 말한다. 그가 코미디언 출신이라는 점을 뜻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젤렌스키가 상대방에게 설득력 있게 호소하는 재능을 발휘하여 어떻게 국제사회의 지원을 이끌어 내고 전시 지도자로 진화해 갔는지를 다룬다.
2차 세계대전과 일련의 사건들을 거치면서, 제국주의나 식민 지배를 하지 않고 외교 분쟁이 있다고 다른 나라를 침공해서 영토와 주권을 빼앗는 행동은 하지 않는 것이 세계의 규범이 되었다.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복잡한 역사에 대해서는 다들 알고 있지만, 과거 어느 시점의 역사를 이유로 지금의 주권과 국경을 침범하는 것 또한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다.
무엇보다 그런 체제가 상당 기간 유지되었기에 발전할 수 있었던 나라가 한국이고, 그런 원칙이 무너지면 화약고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이 한반도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승패에는 원칙이나 상징적 가치뿐만 아니라 현실적 국익과 안보 역시 달려 있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은 1월29일 “오늘은 우크라이나의 문제지만, 내일은 타이완의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하면서 “러시아의 승리는 이란과 북한, 중국을 대담하게 만들 것”이라 지적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17일 뮌헨 안보회의에서 “언제 전쟁이 끝날지 우크라이나에 묻지 말고 오히려 푸틴이 왜 전쟁을 계속할 수 있는지 스스로 물어보라”고 발언했다. 우크라이나가 항복하면 이 전쟁은 일단 끝나겠지만 과연 그게 전쟁의 끝일까.
우크라이나의 하르키우에 살다가 전쟁 이후 아일랜드 더블린으로 가게 된 예바 스칼레츠카는 <당신은 전쟁을 몰라요>라는 책에서 12세 소녀의 눈으로 바라본 전쟁 이야기를 들려준다. 평범한 사람들이 겪는 전쟁은 국제정치, 이른바 ‘나토 1인치 약속’이 있었네 없었네 이런 것이 아니다. 가족, 친구와 헤어지고, 자신의 세계의 전부이던 지역을 떠나야 하는 것이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벌어지면 우크라이나의 무모한 항전을 비난하던 이들도 마주치게 될 현실이다. 남의 나라 하는 일이 마음에 안 든다고 미사일 쏘고 탱크 몰고 쳐들어가면 안 된다는 게 그렇게 어려운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