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권의 손길

오바마의 ‘경청’, 윤석열의 ‘경청’

2024.02.25 15:42 입력 2024.02.25 20:07 수정

정치가 목소리를 경청한다는 건

타자의 고통에 대한 공감을 넘어

그 고통을 치유하는 일이다

정치가 타자의 고통에 함께할 때

낯선 자들은 친근한 우리가 된다

16일 대전 유성구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열린 2024년 학위수여식 중 졸업생 신민기씨가 윤석열 대통령 축사 때 연구·개발 예산 축소 등 문제를 두고 대통령을 향해 항의하다가 경호원들에게 제지를 당하고 있다. 연합뉴스

16일 대전 유성구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열린 2024년 학위수여식 중 졸업생 신민기씨가 윤석열 대통령 축사 때 연구·개발 예산 축소 등 문제를 두고 대통령을 향해 항의하다가 경호원들에게 제지를 당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 청년이 외친다. “행정명령을 발동해 1150만명에 이르는 모든 서류 미비 이민자의 추방을 멈춰주세요! 당신에겐 그럴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제 가족은 모두 흩어져 있습니다. 매일 같이 이민자의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져 지냅니다!” 그러자 연이어 청년들의 큰 외침이 따른다. “추방을 멈춰라! 추방을 멈춰라!”

2013년 11월25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이민개혁법 통과를 촉구하려는 연설을 시작하려던 와중에 벌어진 일이다. 대통령이 수차례 말하려 했지만 높아지는 외침은 끊이질 않았다. 이에 경호원이 제지에 나섰지만, 대통령이 오히려 말린다. “그만, 그만. 청년들이 여기 머물 수 있게 하세요.” 그러자 청중들은 박수로 화답했다.

외침에 대해 오바마 대통령은 이렇게 답했다. “저는 이 청년들의 열정을 존중합니다. 이들은 가족들을 걱정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제안하는 건 좀 더 어려운 길입니다. 민주적 절차를 거치는 겁니다. 그 길은 소리를 지르는 일처럼 쉽지는 않을 겁니다. 로비가 요구되고 실행에 옮겨야 합니다.” 대통령에게 당신의 권한을 쓰라고 외쳤던 청년들도 박수를 보냈다.

이는 ‘다원적’ 세계에서 ‘민주적 정치’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다원적 세계’라는 말은 같은 공간에 서로 다른 수많은 이익, 의견, 처지가 존재한다는 의미다. 이런 세계에서 ‘타인’의 본질은 ‘낯선 자’이다. 나와 다르게 생각하고, 다른 이익을 추구하고, 다른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낯설게 느끼는 건 당연하다. 민주정체가 시끄럽게 서로 갈등하는 이유는 이런 낯선 자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질문할 수 있다. ‘이런 낯선 자들의 공동체가 어떻게 유지될 수 있을까?’ 그 힘은 민주정체가 한편으론 ‘환대’의 공동체라는 데 있다. ‘환대’란 기본적으로 내가 거주하는 공간에서 타자들이 안전하게 머물 수 있도록 배려하는 자세다. 나에겐 타자의 공간에 안전하게 머물 권리이기도 하다. 이런 환대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한다는 표현이고, 이를 통해 우리는 타인과 다른 나의 이익, 의견, 처지를 안심하고 표현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할 수 있다. ‘타자가 나를 환대한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바로 여기에 오바마 대통령이 보여준 ‘경청’의 힘이 있다. 경청이야말로 낯선 자를 환대한다는 적극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경청은 단순히 타자의 말을 듣는 수동적인 일이 아니다. 철학자 한병철은 <타자의 추방>에서 말한다. “경청은 타자를 말하기로 초대하고, 타자가 그의 다름을 드러내도록 풀어준다. 경청은 타자가 자유롭게 말하는 공명의 공간이다.”

하지만 경청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경청엔 몇 가지 덕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선 경청하는 자는 타자의 말을 미리 판단하지 않아야 한다. 미리 판단한다는 것은 이미 듣지 않고 있다는 뜻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경청하는 자는 ‘인내’할 수 있어야 한다. 한병철은 이 인내야말로 “타자에 대한 경청자의 책임감 있는 태도”라고 강조한다. 심지어 경청하는 사람은 타자의 말을 인내하는 가운데 상처받을 각오마저 되어 있어야 한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상처를 감당하며 타자의 말을 듣는 일은 쉽지 않다. 그래서 민주정체에서 정치인들의 역할은 더욱 중요하다. 인내하면서 상처받을 각오를 하고 타자들을 말을 듣는 일, 그래서 낯선 자들을 환대하는 일을 공적으로 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때로 정치인들이 경청하며 받는 상처는 “낯선 이들이 입장하는 열린 곳이다”.

한병철은 “자기 안에서 안전한 안락함을 느끼고 자신을 집에 가두어 놓는 사람은 아무것도 경청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이것은 정치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권력이든 상처받길 거부하며 자기 이익에만 갇히면 다른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정치에서 권력이 귀 기울여 듣지 않는 목소리는 반복되는 단순한 메아리로 남는다. 메아리로 남는 목소리를 가진 자는 ‘여전히’ 낯선 자일 뿐만 아니라 상처 입은 자로 남는다.

그래서 전북특별자치도 출범식, 분당서울대병원 민생토론회, 카이스트 학위수여식에서 연이어 일어난 권력의 ‘입틀막’ 사건은 더욱 씁쓸하다. 정치가 낯선 자들의 목소리를 경청한다는 건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는 일을 넘어 그 고통을 치유하는 일이다. 정치가 타자들의 고통에 함께할 때 낯선 자들은 친근한 ‘우리’가 된다. 이런 이유로 <타자의 추방>에 나온 이 구절은 되새길 가치가 있다.

“경청이 없으면 공동체도 형성되지 않는다. 공동체는 경청하는 집단이다.”

김만권 경희대 학술연구교수·정치철학자

김만권 경희대 학술연구교수·정치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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