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말과 올해 정부·여당은 다시 감세 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주식 양도소득세 대주주 기준 완화, 금융투자소득세 폐지, 상속세 완화, 가업승계 증여세 최저세율 적용구간 확대, 대기업 대상 임시투자세액공제 기간 연장, 자사주 소각과 배당 시 법인세 인하, 부동산 공시가격 현실화 계획 폐지 등 발표가 이어진다. 대부분 부자 감세다. 눈앞의 선거를 의식하면서 준조세 폐지 감면, 가공식품 부가가치세 한시 경감 등 범위도 넓어졌다. 그러나 국정을 책임지는 집권여당이 무분별한 매표 감세 경쟁을 부추기는 오늘 현실은 참담하다.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에게 근대국가는 자기 목적을 갖지 않으며 단지 공동의 목적만을 지향하는 공적 속성을 지닌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 덕에 근대국가는 개인의 재산권과 사적 소유를 제한하며 시민에게 납세 의무를 부과하는 ‘조세 국가’가 될 수 있었다. 조세 국가에서는 조세를 통해 국가와 시민사회 사이에 광범위하고 지속적이며 제도화된 관계가 맺어진다. 그 과정에서는 또한 납세자 누구나 ‘국민’이라는 공통된 정체성을 부여받는다. 가상 속에 존재하던 공동체가 조세의 납부와 징수를 거치면서 비로소 가시화된 실체를 획득하는 셈이다.
조세 국가는 재정을 왕족 소유의 영지나 유전이 아니라 시민사회로부터 조달한다. 시민들에게 재정에 대한 기여를 의무로 부과하는 대신 반대급부로 시민의 정치적 대표성을 인정하고 사회적 보호를 제공한다. 조세와 민주주의, 조세와 보편 복지 사이의 주고받음을 조직하는 것이 조세 국가의 역할이다. 재정의 시민사회에 대한 의존이야말로 민주주의와 복지국가를 추동해온 힘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복지국가의 발전 정도는 복지 재정을 시민사회가 함께 부담하는 정도에 달려 있으며 따라서 조세 국가의 역량 및 조세 수준과 밀접히 연관될 수밖에 없다.
조세 국가가 복지 재정을 시민사회에 의존하려고 증세를 시도하면서 한계에 봉착한다면 복지국가는 좌절되기 쉽다. 상위계층이 자신이 가진 여분의 자원을 공적으로 기여해야 하는 의무를 덜기 위해 조세 국가를 위기에 빠뜨릴 때 복지국가는 약화된다. 그럴 때 부자들을 대변하는 정치권력은 이익집단처럼 퇴화하며 국가를 마땅히 있어야 할 제 위치로부터 탈구시켜 국가의 부재를 초래한다. 그에 맞서 공동체를 회복하려면 조직된 민중이 정치 공간에서 더 강한 조세 국가를 재건해야 한다. 어떤 선거도 그래서 중요한 법이다.
제임스 오코너의 마르크스주의 재정학에서는 자본주의 국가의 기능이 공공투자로 자본축적을 지원하는 것과 복지지출로 체제를 정당화하는 두 가지로 파악된다. 그러나 한국의 역대 정부는 두 기능의 수행을 위해 공공투자나 복지지출을 늘리기보다는 기업과 가계의 세금 부담을 덜어주는 데에 치중했다. 한국의 낮은 조세 수준과 역진적 조세 구조에는 여태 그렇게 유지된 한국형 조세 국가의 특징이 반영되어 있다.
민주화 이후에도 한국의 복지시스템은 외환위기의 충격과 신자유주의의 영향을 피해가기 어려웠다. 신자유주의는 공적 체계를 약화시키며 각자도생을 강제했다. 최근에는 기술 변화가 불러오는 사회적 균열의 위험이 증폭되는 양상이다. 저성장과 고령화를 배경으로 재정건전성을 빌미로 한 역풍도 거세다. 그 귀결은 개인들의 사회로부터의 자발적인 이탈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자살률(현세대의 직접 이탈)과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2세를 두지 않는 간접 이탈)이 수치적 증거다.
그런 점에서 정부·여당이 상위계층의 이해관계를 노골적으로 우선시하며 밀어붙이는 일련의 감세 정책은 한국 사회로선 불행이다. 그 이유는 부자 감세는 조세 국가를 위기로 내몰며 국가의 공적 속성을 약화시키는 정책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지금은 복지비용과 기후위기 대응 및 산업구조 변동에 따르는 비용의 분담을 위한 재정 여력을 증세로 확보해야 하는 시점이다. 피부양인구와 생산인구의 상대적 비중이 변하면서 세입과 세출의 불균형이 구조화되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오늘 정작 필요한 것은 현명한 증세의 정치인 것이다.
박근혜 정권을 붕괴시킨 제1기 촛불은 국가의 부재에 대한 국민적 심판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다가오는 4월 총선은 제2기 촛불 정부로 나아가는 한국 민중의 여정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한다. 조세 국가의 기초를 무너뜨리는 정부·여당의 부자 감세 기조를 투표로 심판해야 한다. 제2기 촛불 정부는 복지국가 발전의 기반을 재건하고 산업전환과 불평등의 비용을 우리 사회 전체가 함께 나누는 대안적 복지체제로의 경로를 적극적으로 열어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