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죄수의 딜레마’에 갇힌 고준위특별법

2024.05.06 20:06 입력 2024.05.06 20:09 수정
은재호 한국행정연구원 선임연구위원

21대 국회의 임기 만료가 코앞인데 여야가 앞다퉈 상정한 고준위특별법이 통과될 기미조차 없다. 부지 내 저장시설 규모와 중간관리시설 확보 시점에 대한 이견 때문이다.

무엇이 옳은지 판단하는 건 각자의 몫이지만 마지막까지 협상과 조정을 포기해선 안 된다. 여야가 자기 신념에 따라 독자적으로 선택할 유인이 있지만, 각자 최선을 추구할수록 그 결과가 모두에게 나쁜 선택이 될 수 있어 그렇다. 장고 끝에 악수라더니, ‘죄수의 딜레마’ 이론이 보여주듯 내 최선의 선택이 상대는 물론 나에게도 최악의 선택인 경우가 드물지 않다.

그러니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여야는 협상에 집중해야 한다. 우리 세대가 싸놓은 ‘핵 똥’(사용후핵연료) 약 1만9000t이 쌓인 상황에서 고준위 방폐장 확보는 원자력의 온갖 혜택을 누린 현세대가 감당할 당연한 책무다. 지상에서 가장 위험한 물질을 상대적으로 더 위험한 곳에 계속 내버려둬서도 안 된다.

장기적인 국가 이익을 위해 지금 여야가 사용할 수 있는 협상전략은 양보의 교환전략과 어젠다 확장전략이다. 전자는 각자의 이익을 바꿔 서로 만족시켜주는 전략이다. 가장 손쉬운 해법은 두 쟁점의 선택지를 맞교환하는 것이다. 즉, 저장시설 규모에 대해서는 야당 안을, 목표 시점 명시 여부에 대해서는 여당 안을 채택함으로써 각자의 위신과 이익을 보장하는 것이다. 고준위특별법과 야당이 원하는 풍력발전특별법을 맞교환하는 것도 방법이다.

그러나 이 방식의 한계는 명확하다. 합의는 쉬울지라도 각 집단의 이익을 실현하는 데 집중하느라 합리적 의사결정을 유예하는 부정적 측면이 있다. 무분별한 주고받기로 비효율적인 정책을 산출해 불필요한 비용 지출을 승인하는 오류가 그것이다.

이에 대한 대안이 어젠다 확장전략이다. 이 전략은 더 많은 의제를 협상 테이블에 올려 선택지를 늘려줌으로써 합의를 더 쉽게 한다. 가장 그럴듯한 시나리오는 포괄적인 에너지 협약을 전제로 현 법안에 합의하는 것이다. 모든 정파가 참여한 정당 간 합의를 통해 에너지 정책협약(2016)과 기후정책 프레임워크(2017)를 구축한 스웨덴 사례가 모범 사례다.

수평적 정권교체에도 불구하고 지속 가능한 에너지 전환의 모태는 협약이다. 이 협약이 맺어지면 에너지 정책이 여당 전유물이 되지 않는다.

정부가 바뀐다고 갑자기 원전산업 생태계가 국제적 경쟁력을 잃는 일도 없고, 신재생에너지가 삭풍을 맞지도 않는다. 원자력발전량을 제한하기 위해 방폐장 용량을 제한할 필요도 없고 저장공간이 남았다고 발전량을 한껏 늘릴 수도 없다.

각 에너지 분야가 긴 시간 동안 완만한 진격과 후퇴를 반복하며 에너지 포트폴리오가 시기별로 최적점에 수렴될 것이다. 물론 ‘죄수의 딜레마’에 갇힌 현세대가 ‘화장실’ 건설에 실패해 역사의 ‘죄수’가 되는 일도 없다. 뒤로 100년, 앞으로 100년을 봐야 한다. 진영을 넘어.

은재호 한국행정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은재호 한국행정연구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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