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수립’이 진실이다

2015.10.06 20:45 입력 2015.10.06 20:52 수정
김정인 | 춘천교대 교수·한국사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냐? 대한민국 수립이냐? 종래의 역사교육과정에서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라 명기했다. 그런데 지난달 박근혜 정부에서 내놓은 2015 개정 역사교육과정에서는 ‘대한민국 수립’이라 바꿨다. 뉴라이트의 ‘건국’사관을 반영했다는 논란이 일자 교육부는 “북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으로 쓰는데 우리는 정부 수립이라고 쓰는 것이 스스로를 격하하는 것이라는 지적이 있었다. 그동안 역사 교과서에서도 건국, 정부 수립 등을 혼재해 사용했으므로 문제가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었다”는 답변을 내놓았다. 색깔론에 기반을 둔 지적과 종전 교과서 혼용 사례에 근거한 의견에 따라 대한민국 수립이라고 썼다는 얘기다. 역사논쟁에서 가장 공정한 잣대는 지적과 의견이 아니라 역사적 진실이다. 이번 역사교육과정이 학문이 아니라 이념과 정쟁에 기반을 둬 만들어졌고 교육부 역시 편향된 한편에 확실히 서 있음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정동칼럼] ‘정부 수립’이 진실이다

‘대한민국 수립’ 논란을 보면서 두 가지 기억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우선, 2008년에 한껏 달아올랐던 건국절 논쟁의 불을 끈 것은 역사학계가 내놓은 한 장의 성명서였다. 1949년에 이승만 정부가 8월15일을 독립기념일로 명명하자고 제안했으나, 제헌국회가 해방과 정부 수립을 동시에 경축하고자 광복절로 바꿨다는 역사적 진실을 담은 성명서였다. 명명백백해진 진실을 아직도 모르거나 혹은 모른 척하며 건국절 주장을 하는 건 정치 행위이지 학문과는 무관하다. 또 하나, 모든 역사 교과서에 실려 있는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 사진이 떠올랐다. 사진 속 기념식장에 내걸린 플래카드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란 글자가 또렷하게 쓰여 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대한민국 수립 중 어느 것이 역사적 진실일까?

1948년 8월15일, 그날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자. 1948년 8월16일자 경향신문은 8월15일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천하에 선포한 거룩한 날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대한민국 30년 8월15일’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여 대한민국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경축식,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 대한민국 정부 수립 축하식 등으로 불린 이 날의 기념식에서는 ‘대한민국정부수립가’가 제창되기도 했다. 왜 이날을 대한민국 수립이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날로 기념하려고 했을까? 1948년 8월16일자 동아일보는 ‘이 역사적 순간을 맞아 최단기일 내에 분단된 강토를 통일하고 완전한 자주독립국가로서 세계 우방과 어깨를 같이하겠다는 맹세를 공고히 하자’는 각오를 다졌다. 같은 날 조선일보 역시 ‘통일을 못 보았다 하더라도 정부 수립을 세계에 선포한 날로 기념하자’고 쓰고 있다. 통일국가 수립을 기약하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경축하던 당시의 시각과 정서는 북한 정권 수립 기사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1948년 9월11일자 조선일보에서는 9월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정부가 정식 수립되었다는 소식을 짤막하게 전하고 있다. 같은 날 경향신문에 따르면 북한에서도 김일성 내각의 출범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구성’이라 불렀다. 이렇게 남과 북에 각각 정부가 수립되었다고 보는 것이 역사적 상식이고 또한 진실이었던 것이다. 역사적 진실에 준거한다면 남한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북한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다고 가르쳐야 할 것이다. 1948년 8월15일의 기억을 좇으면서 해방정국을 살아간 많은 사람들이 남북에 각각 정부가 수립되어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한 현실을 이념을 떠나 못내 안타까워했다는 또 하나의 숙연한 진실을 마주할 수 있었다.

이번 ‘대한민국 수립’ 논란에서 알 수 있듯이 10여년의 역사전쟁을 거치며 정쟁적 이념만이 목청을 높일 뿐, 진실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역사적 진실이고 대한민국 수립은 이념적 해석이다. 이념적 해석이 갖는 폭력성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라는 ‘역사적 진실’에 이념적 잣대를 들이대며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북한을 추종한다고 매도하는 데서 여실히 드러난다. 교육부의 행보가 예사롭지 않다. 이제는 자신이 검정 통과시킨 교과서에 ‘종북좌파’ 딱지까지 붙이며 학문과 진실에 바탕을 둬야 할 역사교육을 정쟁의 광기 속으로 내몰고 있다. 이념이 실증과 진실마저 압도하는 막장의 시대, 끝이 안 보여 더 불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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