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화는 역주행이며 자충수

2015.11.03 20:33 입력 2015.11.03 20:37 수정
김정인 | 춘천교대 교수·한국사

2015년 11월3일 세계 역사전쟁의 역사에 길이 남을 부끄러운 사건이 대한민국에서 일어났다. 신자유주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미국, 영국, 일본 등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권력을 장악한 우익이 애국주의를 앞세우며 역사교과서를 공격하는 역사전쟁이 일어났다. 권력이 역사교과서를 향해 자학사관을 따른다고 비판하는 모양새는 어디든 비슷했다.

하지만 국가가 역사 해석을 독점하며 단 하나의 교과서로 가르치겠다고 나선 곳은 없었다. 박근혜 정부는 기어이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선택했다.

[정동칼럼] 국정화는 역주행이며 자충수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는 물론이고 한국사와 세계사가 하나로 묶인 중학교 <역사> 교과서를 국정화해 세계사조차 하나의 교과서로 가르치는 나라로 만들었다. 세계는 아사히신문의 사설처럼 “민주화된 지 30년 가까이 된 한국은 다양한 가치관이 존재하는 선진국”인데 “왜 역사교과서만 국정화해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렇다면 미국, 영국, 일본 등에서 권력이 역사전쟁을 벌이면서도 국정 카드를 쓰지 않았던, 아니 상상조차 못했던 이유는 뭘까?

세계적으로 역사전쟁이 시작될 무렵, 권력과 지식인이 더 이상 역사를 독점하지 못하는 역사 대중화 시대도 함께 찾아왔다. 과학기술의 진보가 가져온 문화혁명 속에서 역사는 대중문화의 핵심 콘텐츠로 자리 잡아갔다. 영화, 드라마, 다큐멘터리, 광고, 게임 등 다양한 장르에서 역사가 상품화되고 소비되었다. 대중은 역사를 읽고 먹고 냄새 맡고 듣고 보며 즐기게 되었다. 역사가가 아닌 대중저술가에 의해 역사 지식이 생성되고 전파되며 나아가 통념화되는 일도 흔해졌다. 영국 학자인 제롬 드 그루트는 <역사를 소비하다>에서 이러한 역사 대중화를 민주주의적 시각에서 역사의 민주화라고 명명했다. 대중 개개인이 스스로의 안목으로 역사를 선택하고 즐기는 동시에 역사를 해석하는 자유와 권리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현대사 해석을 둘러싸고 국사교과서 준거안 파동이 일던 1990년대 중반부터 역사 대중화의 바람이 불었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와 함께 시대극인 <용의 눈물>, <허준>, <모래시계> 등이 역사 대중화를 이끌었다. 역사전쟁이 본격화된 21세기에 들어와서는 역사 대중화의 시대도 활짝 열렸다. 이제 우리는 책, 드라마, 영화는 물론 게임, 광고 등을 통해 매일 역사를 소비하며 살아가고 있다. 1000만 관객이 본 영화 10편 중 역사극은 1위인 <명량>을 비롯해 5편에 이른다.

대중저술가들이 제각각의 관점에서 쓴 역사서들이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거나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나름의 역사관을 피력하는 대중을 만나는 일도 흔해졌다. 세계와 함께 우리도 역사 소비시대를 살며 대중이 역사를 해석하는 자유와 권리를 누리는 역사 민주화 시대를 맞고 있다. 대중이 역사 해석의 독점을 상징하는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는 과감하게 역주행을 선택했다. 많은 비판이 쏟아지는 가운데 대부분 언론도 다양한 역사 해석이 가능한 시대에 역행하는 획일적 조치라는 입장을 내놓았다.

역사 민주화 시대의 역사교육은 학생이 다양한 역사 해석의 관점을 학습하고 스스로의 역사 해석 능력을 키우는 데 목적을 두어야 한다. 미래에 시민으로 살아갈 오늘의 학생들은 풍성한 문화 상품이나 미디어 등을 통해 역사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향유하는 매일을 살고 있다. 일상에서 다채로운 시각이 담긴 역사 상품들을 소비하고 있는 학생들의 세계관에 역사교과서가 미치는 영향은 예전과 비할 바가 못 된다.

그들이 지금 역사 해석의 ‘다름’을 ‘틀림’이라고 주장하는 권력을 향해 대학생들과 함께 거리에서 전체주의적 발상을 거두라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1990년대 이후 역사 대중화 바람 속에 태어나고 성장한 소위 ‘역사 민주화 세대’들이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강한 거부감을 보이고 있다.

역사 민주화 시대에 권력의 역사 독점 시도에 맞서 일어난 역사 민주화 투쟁은 앞으로 국정화의 길이 결코 순탄치 않을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역사전쟁에서 권력이 마지막 승부수를 던졌다는 걸 의미한다. 검정이라는 경쟁을 포기하고 국정이라는 독점을 강행하는 그들에게는 이제 더 이상 쓸 수 있는 공격무기가 없다. 오히려 국정화 과정이 진행될수록 역공에 몰릴 가능성이 크다. 이런 점에서 국정화는 역주행이자 자충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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