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들이 알아버린 세상

2018.04.01 21:14 입력 2018.04.01 21:15 수정

내가 미국에서 공부하던 2000년대 초반은 포스트구조주의와 신자유주의 시장경제가 공고한 형제애를 발휘할 때였다. 현장을 전혀 모르고 이론으로만 접근하던 나는 성을 파는 행위가 노동으로 인정받아야 여성들의 권익이 향상된다고 믿었다. 언론보도와 영어로 번역된 일본 및 재미 학자들의 논의만 접하던 나는 한국의 일본군 성노예제 운동을 남성중심적 민족주의 운동이라고 여겼고 당사자들의 다양한 목소리가 억압된다고 생각했다. 능동적으로 성적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 여성들에게 진정한 성적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줄 것이라 믿기도 했다.

[정동칼럼]여성들이 알아버린 세상

학위 논문을 준비하다 기지촌에서 자원 활동가로 일하게 되면서 현장에서 힘겹게 투쟁하던 반성매매 활동가들을 만나게 되었다. 수요시위에 나가면서 생존자들의 삶을 돌보고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기 위해 생을 바친 활동가들을 알게 되었다. 당사자들을 만나고 어떻게 살아가는지 목격하고 난 후에도, ‘진심’을 나누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맥락을 이해하며 의미화하는 데는 더 많은 수련이 필요했다.

서구식 지적 허영기를 덜어내고, 알고 있다고 굳게 믿었던 것들이 진실이 아님을 깨닫는 데는 더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표현의 자유냐 아니냐의 이분법적 논리구조 밖에서 봐야 음란물이 생산되고, 생산하는 구조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도 시간이 걸렸다. 인간을 특정한 존재로 느끼는 성적 욕망과, 상대방을 비인간화하는 성적 대상화가 연결되어 있으되 다른 의미라는 사실을, 심지어 욕망을 표현할 자유가 누구에게만 허락되는지 알게 되는 데도 상당한 시일이 걸렸다. 다행이었다.

나는 이제 안다. 오늘날 불꽃처럼 타오르는 ‘미투 운동’의 저변에 무엇이 있었는지. 상대방을 지배하고 통치하기 위한 수단으로 집단 성폭력이 자행되고, 점령지 강간을 예방하고 군인들의 성적 욕망을 풀어야 한다는 모순된 명목으로 여성을 노예화했음을. 남성들 간 교류와 비즈니스를 위해, 때론 전리품으로 여성들이 교환되고 거래되어 왔음을. 공창시설이 사창가, 터키탕, 방석집, 티켓다방, 안마시술소, 유리방, 룸살롱, 룸카페, 단란주점 등으로 변주되며 남성문화의 주요한 토대가 되고 있음을. ‘싫어요’라고 한마디도 할 수 없는 처지에 여성을 결박시키고, 총각딱지 떼러 오는 청소년부터 노인, 동네 양아치, 사업가, 교육자, 정치인, 의사, 법조인, 기자, 경찰 할 것 없이 ‘손님’이란 이름으로 가장해 인정사정없이 여성들을 만지고, 멸시하고, 괴롭히고, 때리고, 강간하는 곳이 전국 방방곡곡에 성업 중인 성매매 현장임을.

살아 있는 살과 피를 지닌 인간이 아니라, 그저 파편화된 사물 혹은 섹스로 환원되는 조각난 몸들이 온갖 기술의 지원을 받고 상업주의와 결합되어 갖가지 형태로 재현되고 소비되고 유통됨을.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전파된 여성 비하적 성적 이미지가 현실 여성들을 이해하는 창이 되어 왔음을. 집 안의 여성들에게 순결과 정조를 강조하고 다른 여성들에게는 ‘더러운 X’ ‘음탕한 X’ ‘걸레’ ‘창녀’ 등 각종 오명과 낙인을 덮어씌우며, 여성을 이분화하고 혐오해 온 그 유구한 역사가 오늘날 개념녀 대 김치녀, 심지어는 페미니스트 대 메갈로 변주되고 있음을. 역사적으로 주어진 선택지 이상을 상상하거나 요구하는 여성들에게는 신체적, 정신적으로 가혹한 처벌이 뒤따랐음을.

그런 문화 속에서 ‘손바닥도 마주쳐야 한다’ ‘여자의 노는 예스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그럴 만한 여자만 당한다’ 등의 각종 강간 신화가 구축되고 정당화되어 왔음을. ‘자기 몸 하나 간수하지 못해’, ‘몸을 더럽힌’ 여자들이 ‘수치스러워’, ‘집 안 망신시킬까’ 감춰야 했던 그것이 바로 강간이었음을. 그 고통이, 아픔이, 목숨이, 우쭐대며 던지는 농담이나 과시용 자랑거리, 술자리 뒷담화로 소비돼 왔음을. 심지어 고결한 문학이나 예술이란 옷을 걸치고, 진리를 추구한다는 각종 학문의 외피를 입은 채 정당화되어 왔음을.

여성들은 이제 안다. 남성우월주의 사회에서 여성을 지배하고 통제하기 위해 성이 활용되고 강간이 동원되던 방식을. 당신이 아무리 부인하고 외면한다 한들, 성차별적 구조를 (재)생산하고 지탱하는 도구가 성폭력임을 여성들은 이미 알아버렸다. ‘펜스룰’로 반격하고 ‘진영 논리’로 왜곡하고, 특정 집단의 문제로 축소하려 해도 더 이상은 속아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여성들이 다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지금, 당신의 선택은 자명한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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