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고릴라’의 혁명

2018.03.29 21:27 입력 2018.03.29 21:38 수정

[정동칼럼]‘보이지 않는 고릴라’의 혁명

‘보이지 않는 고릴라’라는 짧은 실험 동영상이 있다.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몇 번 공을 패스하는지 세어보라”는 지시가 나오고, 검은 옷을 입은 세 명과 흰옷을 입은 세 명이 농구공 두 개를 쉴새없이 주고받는다. 이 동영상을 본 사람들 중 반 정도는 사람들 사이로 고릴라가 지나가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고 한다. 공에 집중하느라 고릴라가 안 보이는 것이다. 심리학자 크리스토퍼 차브리스와 대니얼 사이먼즈가 제작한 영상이다. 선택적 인지, 선택적 기억은 소설이나 영화를 볼 때도 경험할 수 있다. 어떤 이야기를 핵심으로 보는가에 따라 관련성이 적은 내용을 나도 모르게 걸러내고 잘 기억하지도 못한다. 우선순위를 설정함으로써 지각과 사고의 범위가 제한되는 것이다. 더욱이 공을 던지는 사람들 틈에 고릴라가 나타나리라고 상상하기는 어렵다. 상상력이나 선지식이 없을 때도 인지 가능성은 줄어든다. 거꾸로 고릴라를 관찰하라고 한다면 공을 던지는 횟수를 정확히 세기가 어려울 것이다.

이 동영상은 특정한 문화적 훈련이나 정치적 방향제시의 효과와 부작용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한다. ‘미투(#MeToo)’ 운동이 정치공작에 악용될 수 있다는 김어준씨의 발언이 폭풍을 일으켰었다. 그는 미투 운동을 변질시켜 진보진영에 타격을 입히려는 정치공작을 경계하고 미투 운동의 와중에 이명박 전 대통령(MB)의 비리의혹들이 잊힐까 염려했다. 시야에 드러나지 않는 고릴라를 찾는 것은 그 나름의 유의미한 기술이다. 정봉주 전 의원이 성추행 의혹 보도에 맞서 결백을 주장하면서 이른바 ‘공작’의 가능성이 부각되는 듯했다. 그러나 MB는 수감되었고 그에 대한 조사는 진행 중이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는 피감독자 간음 및 강제추행 등으로 검찰 수사를 받게 되었고 국민에게 사과했다. 성추행 의혹을 전면 부인했던 정봉주씨는 결국 의혹을 보도한 언론사에 대한 고소를 취하하고 서울시장 출마를 포기했다. 공작이 있는지, 혹은 공작을 찾아내는 일로 단련된 사람이 그것을 보고싶어 했는지는 따져봐야 할 일이다.

미투 운동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는 우려가 전적으로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불가능할 것 같던 많은 일들이 우리 정치현실에서 일어났으니 말이다. 실제로 시류에 올라타 성폭력을 진보의 문제로 치부하는 보수의 공세가 있으므로 그것이 보수의 자가당착임을 비판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특정 목적을 위해 “피해자들을 준비시켜서” 미투 운동을 몰고 간다는 발언은 사실에 근거한 진단이 아니라 자칭 “예언”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크다. 공놀이 장면에 고릴라가 등장할 것이라는 “예언”이 고릴라를 기다리느라 공놀이를 볼 수 없게 만들고, 없는 고릴라도 상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는 생각에 몰두해서 보이는 것을 보지 못하는 동안, 고릴라는 있든 없든 어느새 주인공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성폭력 피해자와 그들의 고통스러운 폭로를 ‘공작’과 결부시키게 되고, 피해자의 폭로가 특정 정치적 목적에 봉사하도록 이용 혹은 기획되었다는 식의 근거 없는 음모론이 심각한 2차 피해를 야기한다.

정치공작 “예언”에 이처럼 끈질기게 문제를 제기하는 이유는 그것이 진보 내의 보수 영역인 남성중심적 관점과 미흡한 젠더감수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성피해 여성을 누군가 이용한다면, 우선 성피해를 입은 여성이 있다는 말이 아닌가. 그렇다면 현 정권과 진보세력의 정치적 입지 손상을 말하기 이전에, 피해자를 어떻게 보호할 것인지, 진보진영 내의 성폭력 문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성찰이 우선해야 하지 않겠는가.

1970~1980년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뿌리를 두는 현재 진보진영의 문화는 여전히 남성중심적이다. 국가와 계급의 문제, 보편가치의 추구라는 플롯을 우선시하라는 지시를 충실히 내면화한 수많은 정치적 주체들(시민이라 쓰고 남성이라 읽는다)에게 성평등, 여성인권의 요구는 보이지 않는 고릴라였다. 미투 운동은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만연한 성폭력의 문제가 시민사회의 시야에서 더 이상 선택적으로 배제될 수 없는 일임을 천명한다. 그러나 정치공작 “예언”은 미투 운동의 장에서 궁극적으로 진보세력의 정치적 위상이 손상될 것을 우려함으로써 성평등을 부차적인 사안으로 격하했다. 성피해 여성을 수단화하는 책동이 은근히 미투 운동의 숨은 주인공이 된다면 결국 미투 운동은 진보와 보수가 세력을 다투는 정치지형의 주변으로 밀려나는 셈이다.

하지만 계속해서 드러나는 상처와 고통을 보면서도 그것을 시각장에서 지울 수는 없다. 미투 운동은 성폭력 피해여성들이 스스로를 드러낸 덕분에 오랫동안 보이지 않았던 우리 모두의 상처를 치유해가는 긴 혁명이다. 우리는 되돌아갈 수 없는 모퉁이를 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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