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범의 추억

2007.05.28 17:51

〈유병선 논설위원〉

내 친구 Y는 20년이 지난 일을 지금도 꿈을 꾼다고 했다. 넥타이 부대들이 시청앞으로 뛰쳐나왔던 1987년 Y는 직장 새내기였다. Y는 동료들과 회식을 하다 옆 사람들과 시비가 붙었고, 주먹다툼을 하다 유치장 신세를 졌다. 그때 잡범의 기억이 꿈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취조에 나선 형사가 예, 아니오로만 답하라며 “오른 주먹으로 상대의 왼쪽 얼굴을 5차례 가격했다. 그래, 안 그래?”라고 다그친다. 누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뒤엉켜 다퉜는데 오른손으로 쳤는지, 몇차례나 때렸는지 어찌 알겠는가. “모른다”고 하자 “악질이네”라고 얼굴을 붉힌 형사는 “아니다”란 대답에 “이거 빨갱이구먼”이라며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친다. Y는 꽝하는 소리에 놀라 잠을 깬다고 했다.

지난주말 만난 Y는 전경련을 얘기하다 20년전 잡범의 추억을 꺼냈다. 전경련이 교육부와 함께 반시장·반기업 정서를 바로잡겠다며 만든 ‘차세대 고등학교 경제교과서 모형’을 일선 교사에게 배포하겠노라고 발표했던 참이다. 교재의 일방적 배포 결정을 내린 전경련의 겁날 거 없다는 태도가 겁난다고 했다.

하지만 지식의 고고학자를 자처하는 Y가 경제교과서에서 잡범의 추억을 떠올린 연상의 고리는 전경련의 희한한 계몽주의였다. 반기업정서라는 ‘신화’를 만든 뒤, 나쁜 생각을 하는 국민의 의식을 고치자며 21세기판 새마을운동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 전경련 ‘반기업정서’ 해소 골몰 -

Y가 발굴한 반기업정서의 신화는 이렇다. 2003년 상공회의소는 매년 두차례 기업 호감도 조사를 시작했다. 반기업정서가 높으니 지수로 보여주자는 취지였다. 그해 말 조사에서 기업 호감도 지수가 38.2점이 나오자 경제단체와 논객들이 목청을 높였다. 국민의 61.8%가 반기업정서를 갖고 있으니 나라가 망할지 모른다는 걱정이었다. 그 무렵 불거진 SK분식회계와 차떼기 대선자금은 물론이고, 그해 미국의 기업 호감도도 40%대였다는 사실은 무시했다. 당시 박용성 상의 회장은 2년 뒤 밝혀졌듯 거액의 분식회계를 하고 있으면서 반기업정서 해소를 위한 계몽운동을 지휘했다. 경제교과서 고치기도 그때 나온 발상이다. 최근 조사에서 호감도가 50점이 넘었지만 반기업정서 타령은 그대로다. 전경련식 계몽운동은 아직도 배고픈 셈이다.

호감도가 낮으면 좋은 인상을 주려고 노력하는 것이 정상이다. 더구나 호감을 갖고 있지 않다고 반감을 갖고 있다고 보는 것은 극단적 흑백논리다. Y가 전경련식 계몽운동을 경계하는 게 바로 이 대목이다. 떳떳하게 돈 많이 벌고, 예전의 잘못된 관행을 고쳐나가면 기업 호감도는 자연히 높아진다. 반기업정서 타령은 기업의 불법과 부정에서 관심을 멀어지게 만들면서, 기업을 삐딱하게 보는 국민이 잘못됐다고 하는 타박이자 윽박지르기다. 경제교과서도 그 연장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Y의 꿈을 어지럽히는 것은 계몽운동에서 예전 빨갱이의 낙인이 묻어난다는 점이다. 용공과 빨갱이가 이젠 반시장과 반기업이란 말로 바뀌었을 뿐이라는 얘기다. ‘반기업’은 곧 빨갱이와 다를 바 없고, 시장경제의 부작용을 얘기하는 사람은 ‘얼치기’가 된다. 가차없는 편가르기다. 시장과 성장을 얘기하면 경제전문가이고, 복지와 분배를 입에 올리면 곧바로 얼치기 낙인이 찍힌다. 기업이 지배구조를 개선하고, 윤리경영 등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화해야 하며 회계 투명성을 높이는 것이 세계적 추세라고 말해도 ‘기업의 목적이 이윤추구’라는 사실을 왜곡하는 반기업적 얼치기로 몰린다. Y는 이런 계몽운동가를 잡범의 추억 속 형사와 분간할 수 없다고 했다.

-경제교과서로 의식개조 강요-

Y와 만난 날 나도 악몽을 꾸었다. 잡범의 추억이 전염됐다. 꿈에서 나는 칼럼을 준비하며 기업에 대해 자기검열을 하고 있었다. 이익을 많이 내는 기업을 좋아하고, 채용 공고를 볼 때면 눈물마저 핑 돈다. 하지만 수천억원이나 회계를 조작하거나, 정치자금을 차로 실어 날랐다거나, 상속세를 줄이려 꼼수를 쓴다거나 하는 기업의 불법은 묵과하지 못한다. 이쯤에서 말끔한 차림의 형사가 묻는다. “당신의 반기업정서는 80점(기업 호감도 20점)이지? 그래, 안 그래?” 내가 “아니다”라고 하자 그 형사도 책상을 내리치며 소리친다. “이거 완전히 얼치기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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