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이 꿈꾸는 법원

2010.02.01 18:11 입력 2010.02.01 23:34 수정
박래용 논설위원

[경향의 눈]한나라당이 꿈꾸는 법원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OO부 나사법 판사는 서둘러 부장판사실로 갔다. 방에는 우배석 판사가 먼저 와 있었다. 흘낏 바라보는 부장판사의 시선이 따갑다. 말쑥한 양복 차림의 30대 남자가 부장판사에게 눈인사를 하고 방을 나갔다. 국회 사법감시단 소속 직원이다. 2010년 초 몇몇 시국사건의 무죄판결 이후 ‘이런 법원을 그냥 놔둘 수 없다’며 입법부에서 만든 조직이다. 그 이후 주요 사건은 집권당과 판결을 사전협의토록 했다. 과거에 입었던 검은색 법복도 달라진 시대를 반영하지 못한다는 여당 요청에 따라 연청색으로 색깔이 바뀌었다.

오전 11시. 법정에 들어서자 썰렁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거의 모든 재판에서 검찰 구형이 그대로 반영되면서 기자들도 법정 발걸음을 끊은 지 오래다.

오늘 사건은 살인미수·폭발물 사용 예비음모로 기소된 50대 피고인.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도시락을 까먹다가 정부중앙청사 도시락 폭탄 투척 미수범으로 붙잡혔다. 본인은 날이 따뜻해 나들이 나온 것이라고 했지만 라이터 소지에 까나리액젓 반찬이 화근이 됐다. 까나리액젓에 불을 붙여 던지면 인명살상이 가능하다는 게 검찰 논리였다. 평소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운운하며 사회 비판 발언을 자주 했다는 주변 증언도 뒷받침됐다. 야당과 시민단체에선 얼토당토않은 수사라며 반발했지만 “주변에 식당이 허다한데 청사 앞에서 밥을 먹는다는 게 상식에 어긋난다”고 보수 언론은 몰아쳤다.

보수의 판단이 법·진리인 사회

피고인에게는 징역 12년이 선고됐다. 놀랄 일도 아니다. 사법부는 철저히 통제됐다. 요즘 형사사건은 컴퓨터를 통한 자동배당제는 사라지고 수석부장이 배정하고 있다. 검사·변호사 등 외부 법조 경력자를 법관으로 임용하는 경력법관에는 한 해 40~50명씩 검사 출신들이 들어오고 있다. 법원 내 사조직은 일절 금지됐지만, 이들은 ‘검판회(檢判會)’란 친목모임을 만들어 판결을 주도하고 있다. 경력 10년 이상 법관이 맡는 단독판사는 대부분 검사 출신들이 맡고 있다. 종전 법원 양형기준은 권고적 효력만 가졌지만 이제는 양형기준법이 만들어져 ‘A범죄=3년, B범죄=5년’ 식으로 정찰가 판결이 내려지고 있다. 영장 재항고제도 실시 중이다. 어쩌다 영장이 기각되더라도 검찰은 상급심에 토씨 하나 안 바꾼 채 영장을 재청구해 발부받는 게 관행이 됐다. 대한변협은 무죄판결을 내린 판사들을 개별 평가해 퇴직 후 변호사 가입을 거부하고 있다. 변호사는 본시 피고인의 무죄를 주장하는 사람들인데, 무죄를 선고했다고 판사를 매질한다는 게 이해가 안되지만 어디 내놓고 할 얘기는 아니다.

사람들은 중세 암흑시대와 같이 반이성이 이성을 지배하는 야만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수군댔다. 중세 교회가 정치·사회·문화 모든 분야에 간섭했던 것처럼 이제는 보수 세력이 로마 교황의 수위권(首位權)을 차지했다. 보수 언론이 표적을 지목하면 극우단체들이 몰려가 욕을 보이고, 보수 여당이 후속 대책을 입법화했다. 보수의 판단이 법이요, 진리요, 상식이 됐다. 보수는 이제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무류(無謬)의 신적 지위로 올라앉았다.

얼마 전에는 한국기원의 ‘우리바둑연구회’가 해체됐다. 일부 프로기사들이 포석 단계에서 좌변을 선호하는데 그 배경에 바둑연구모임인 ‘우리바둑연구회’ 소속 기사들이 지목됐기 때문이다. 보수 언론에선 “기원 내부에서도 이해 못할 포석’이라고 몰아붙였다. 한두 판의 바둑만 보고 판단할 것은 아니라는 항변도 나왔지만 “그러려면 프로기사 옷을 벗고 동네 기원에나 가서 두라”는 비판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검찰 공소장 그대로 판결문으로

재판이 끝나고 방에 돌아와 다음주 예정된 사건 기록을 보기 시작했지만 금세 끝났다. 따로 법리를 고민할 것도, 수사기록을 면밀히 검토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검찰 공소장을 주어만 바꿔 판결문으로 내놓으면 된다. 몇 달 후 법관재임용 심사를 앞두고 있는 그로서는 더욱 몸조심을 해야 할 때이다. 사무실 불을 끄고 나오려는 순간 벽에 걸려 있는 대법원장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신영철 대법원장이다. 사진 밑에는 ‘대법원장이 지켜보고 있다’는 원훈이 붙어 있다. 순간 움찔했지만 다시 돌아가 앉고 싶진 않았다. 바깥은 아직 추웠다.

추천기사

기사 읽으면 전시회 초대권을 드려요!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