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연의, 김말해의, 당신과 나의 밀양

2014.04.25 20:58
김별아 | 소설가

1874년 프랑스 파리에서 이색적인 책 2권이 간행되었다. 선교사 샤를 달레가 한국 교구의 다블뤼 신부가 수집해 보낸 자료에 입각해 집필한 <조선교회사>였다. 조선의 기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내용이 많아 귀중한 사료로 일컬어지는 이 책에서, 조선은 ‘이야기의 나라’다. 샤를 달레는 조선인들을 천성적으로 ‘여행’과 ‘이야기’를 즐기는 사람들로 묘사했다. 일제강점기 경성제국대학에서 조선 문학을 가르쳤던 다카하시 도루의 논문 <조선의 유머>에도 유사한 견해가 발견되는데, 그가 지적한 조선인의 특징은 ‘친절함’과 ‘이야기 즐기기’였다.

[낮은 목소리로]전도연의, 김말해의, 당신과 나의 밀양

구한말의 풍경을 암울하게만 떠올리는 우리에겐 신선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장거리나 빨래터에서 객주의 봉놋방과 행랑방에서, 때로 박장대소하고, 눈물 흘리며 이야기를 주고받는 조상들의 모습을 상상한다. 현대에 이르러 문화예술의 방법론으로 주목받는 ‘스토리텔링’을 굳이 들먹이지 않아도, 그들에게 이야기야말로 고단한 일상을 견디고 억눌린 욕구를 승화시키는 탈출구였던 것이다.

이따금 “내가 살아온 세월로 말하자면 소설책 몇 권으로도 모자랄 거야!”라고 말하는 이들을 만난다. 모든 소리가 음악이 되지 못하는 것처럼 모든 이야기가 소설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소설을 ‘기막힌 이야기’라고 믿는 사람들은 소설가인 나를 잡고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그럴 때 나는 이야기의 내용보다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의 간절한 눈빛에 주목한다. 바스러진, 일방통행의, 외로운 이야기들이 부유하는 세상에서 그들은 누구라도 귀 기울여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안내 방송을 믿지 말라!”고 아이를 가르친 날, 처음으로 이 땅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정치적·사회적 환멸로 이민 운운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미치지만 않는다면 ‘다이내믹 코리아’야말로 작가에게 좋은 삶터라고 믿어왔건만, 눈앞에 펼쳐진 참극에 정말 미쳐버릴 지경이었던 것이다. 꽃봉오리 같은 아이들이 겪었을 고통과 공포를 생각하면 이 믿을 수 없는 나라에서 마음부터 떠났다. 그렇게 뉴스를 보며 울다 화내다를 반복하다가 읽은 책이 바로 <밀양을 살다>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책을 통해 나는 다시금 이야기의 힘을 확인하고 적이 위로받았다. 그래도 살아야 할 이유, 떠나지 못할 이유가 그곳에 오롯이 새겨져 있었기에.

‘밀양’은 어느덧 특정 지명을 넘어선 하나의 상징이다. 배우 전도연의 모습으로 떠올리는 밀양은 구원과 용서의 의미에 대한 질문이다. 여중생 집단 성폭행이라는 끔찍한 폭력의 기억도 밀양과 함께 떠오른다.

그리고 86세의 김말해 할머니가 8년째 노구를 끌고 76만5000볼트의 송전탑을 막기 위해 싸우는 밀양이 있다. ‘빽빽한(密) 볕(陽)’이 작열하는 가운데 한때 ‘추화군’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대로 ‘불(火)을 밀어내기(抽)’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밀양 농성장 강제철거를 목전에 두고 출간된 인터뷰집 <밀양을 살다>는 추상적인 상징을 돌연히 뛰어넘는다. 밀양 사람들이 직접 이야기하는 밀양은 구체적이다. 이야기 속에서 그들은 투사이거나 데모꾼으로 뭉뚱그려 부를 수 없는 생생한 삶의 주인공이다. 싸움의 이유는 모두 다르다. 돈 이야기도 있다. 4억8000만원이나 담보대출 받을 수 있었던 땅을 하루아침에 100원도 못 쳐준다는데 평생토록 뼈 빠지게 일해 일군 재산을 어떻게 포기할 수 있나? 선산에 모신 조상을 지키려는 꼿꼿한 반가의 명분이 있는가 하면, 병든 몸을 치유시켜준 자연에 대한 지극한 애정도 있다. 나고 자란 땅에서 신산한 역사를 온몸으로 겪어낸 할매들의 눅진한 이야기와, 은퇴 후 터 잡은 제2의 고향을 포기할 수 없는 귀농 생활자들의 새뜻한 이야기가 어우러진다. 새된 비명을 지르거나 징징거리며 하소연하는 대신 담담하게 이야기 자락을 풀어낸다. 밀양을 꼭 지켜야만 하는 그들만의 이유와 포기할 수 없는 삶의 내력을. 그래서 그들은 지금 밀양에 사는 것만이 아니라 역사의 밀양을 사는 것이다.

지시와 통제를 좋아하는 이들은 이야기를 좋아할 수 없다. 이야기를 하려면 자기 삶에 정직해져야 하고 이야기를 들으려면 일단 침묵하고 귀 기울여야 하는데, 그들에게는 그럴 능력도 의지도 없기 때문이다. 이야기들을 영원히 묻어버리기 위해 밀양 농성장을 강제철거하려는 계획은 세월호 사고로 인해 5월로 미루어졌다. 물에서도 뭍에서도 희망의 이야기가 짓밟혀가는 이 땅에서, 오늘 우리는 밀양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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