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 전체의 ‘패배’다

2014.12.21 20:34 입력 2014.12.21 20:40 수정
한윤정 | 문화부장

“합법 정당을 가장해… 활동하면서 민주적 기본질서를 파괴하려는 진보당의 고유의 위험성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정당해산 결정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

지난 19일 헌법재판소가 내린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을 보면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분노를 느꼈다. 그 분노의 내용은 정윤회 문건 유출사건을 볼 때의 냉소나 조현아 ‘땅콩 회항’ 사건을 볼 때의 흥분과는 결이 다른, 착잡함이었다. 그리고 분노의 대상은 일차적으로는 헌법재판소이지만 여당과 야당, 진보와 보수 모두를 향했다. 왜 우리가 반공을 국시로 한 냉전 국가로 퇴보해야 하는가.

[아침을 열며]우리 사회 전체의 ‘패배’다

한국 사회의 이념 간, 세대 간, 계층 간 대립이 극심해진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복지, 증세, 경기부양, 남북관계 등 각종 쟁점에 대해 누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대개 예측이 가능하다. 소통도, 합의도 어려운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렇다고 이번 진보당 해산 결정에 대해서도 과연 그럴까.

일부 수구반공세력을 제외한다면 보수층에서도 선뜻 잘했다고 손을 들어줄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진보당을 싫어하고 그 정당의 활동을 우려하더라도 “꼭 이런 극단적 방법밖에 없나”라는 회의가 드는 게 국민들의 양식이자 법 감정이다. 여기에 이석기 전 의원을 비롯한 진보당 일부 세력의 내란음모 혐의에 대한 대법원 재판이 진행 중이고, 청와대가 비선 권력다툼으로 궁지에 몰린 상황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해산 결정의 정당성은 더욱 약해진다.

진보당 해산 결정의 가장 큰 폐해는 이념 대립을 부추기는 것이다. 선거에서 선택되고 국회에서 검증받는 과정을 통해 이념적 다양성이 어디까지 용인되는지 시험하던 좌파 정당정치의 숨통을 끊었다.

이 바람에 국민의 판단은 효력을 상실했고, 진보당의 주축인 소위 자주파(NL)들의 무분별한 종북적 세계관은 다시 ‘민주화 투쟁’이란 장막 속으로 들어갔다. 뉴욕타임스 등 외신들까지 한국의 민주주의를 우려하는 상황이고 보면, “국민의 세금으로 상당한 액수의 정당보조금을 받아 활동”하던 ‘빨갱이’들을 공적 정치의 장에서 몰아낸, 단순명쾌한 사안이 아니다.

왜 헌정사상 처음이라는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됐을까.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 황교안 법무장관, 박한철 헌법재판소장 등 공안검사 출신 3인의 작품이란 해석이 많다. 정권의 주요 지위를 같은 세력이 차지할 때 어떤 일이 생기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임기 6년의 헌법재판관들도 다르지 않다는 데 있다. 9명 중 7명의 재판관이 법원 고위직 출신이고, 소장을 포함한 나머지 2명이 공안통으로 불려온 검찰 고위직 출신이다. 지역적으로 5명이 경상도 출신이다. 그 결과 야당 추천의 김이수 재판관을 제외한 8명이 같은 의견을 내는 편파성을 낳았다. 심지어 진보 성향의 이용훈 전 대법원장이 추천한 이정미 재판관이나 여야 합의로 추천한 강일원 재판관도 다를 바 없었다.

국민 다수 의견과 법 감정을 반영하며 다양성을 생명으로 하는 헌법재판소가 동질적 보수집단이 된 것은 우리 정치가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보와 보수 진영의 가장 대표적인 입장을 유지해 차별적 다양성을 드러낼 수 있는 재판관 후보자들이 상대 진영의 집요한 공격으로 낙마하면서 무난한 인물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이는 핵심권력의 향배에 따라 쏠리는 수렴성이 커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동질성이 높아지면 그 체계가 파괴된다는 열역학 제2법칙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헌법재판소는 20년 이상 쌓아온 신뢰와 명성이 무너질 처지에 놓여 있다.

자유와 개방, 다양성의 가치를 훼손시켰다는 점에서 이번 결정은 보수의 승리, 진보의 패배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패배이다. 특정인들이 모의하고 주도해서 나온 결과가 아니라 반대 정치세력을 인정하지 않는 대립 일변도의 정치가 낳은 파국이다.

이미 상황은 나빠지기 시작했다. 검찰은 공안대책회의에서 진보당 해산 반대 집회와 시위를 금지하기로 했다. 보수단체는 이정희 진보당 대표 등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발했다. 서울광장은 다시 촛불과 구호로 뒤덮였다.

헌법재판소는 이런 상황을 우려한 듯 “이번 결정의 의미를 확대하여서는 안된다”고 덧붙였다. 이것이 결정의 편파성에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지만, 그나마 귀 기울여 들어야 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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