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덫

2016.06.19 21:01 입력 2016.06.19 21:03 수정

15년 전쯤으로 기억한다. 퇴근길 종로3가역에서 노신사가 출입문을 들어섰다. 한 손에 노란 봉투를 거머쥔 그는 노약자석에 자리를 잡았다. 무심히 노신사를 바라보던 필자는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에 기억을 더듬었다. 그리고 그분이 바로 현승종 전 국무총리임을 알게 됐다. 그 순간 어색함, 경이로움, 반가움 등 여러 감정이 동시에 올라왔다. 주변의 시민들 역시 비슷한 심정이었는지 전철 안은 알 수 없는 흥분으로 술렁였다. 하지만 그분은 주위의 눈길에 아랑곳 않고 너무도 편안히 앉아 계셨다. 마치 당신이 매일 반복하는 삶의 일부, 일상인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그날 전철에서 내려 집으로 향하는 필자의 발걸음은 참 가벼웠다.

[아침을 열며]욕망의 덫

또 다른 한 분은 연세대 교수와 두 차례 교육부총리를 지냈다. 여러 차례 총리 물망에도 올랐다. 하지만 그는 2005년 부총리를 끝으로 서울에서 사라졌다. 모든 것을 버리고 강원도 고성군 작은 마을 산기슭에 농가주택을 손수 지어 은거했다. 지금은 부인과 함께 300여평의 텃밭에 각종 채소와 과실수를 가꾸며 산다. 바로 안병영 전 교육부총리다. 최근 그는 한 언론사 인터뷰에서 10년 귀거래사의 소회를 이렇게 털어놓았다. “서울에서는 정치도 너무 가깝게 보이고, 앙앙불락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의 삶은 체면이나 하찮은 명예를 상관할 필요가 없고 뿌리 깊은 연고의 늪에서도 해방될 수 있었다”고. 그는 농번기엔 농사일로, 농한기에는 글쓰고 독서하며 무욕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이분들의 삶이 그렇게 특별한 것은 아니다. 배고프면 밥 먹고, 때 되면 일하고, 잠 오면 잠자는 자연스러운 우리 삶의 한 단면이다. 그런데도 왜 이들의 평범한 삶에 새삼 눈길이 가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지금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불편한 현실이 이들의 삶을 특별하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이 특별함은 우리 사회에 넘쳐나는 절제되지 못한 욕망의 탓이 크다. 물러날 때를 알아 물러나기보다는 어떤 일이든, 어떤 자리든, 부른 사람이 누구든 상관없이 얼굴을 디밀고 자리를 꿰차고, 절제되지 못한 탐욕으로 몸을 버린 이들을 너무 자주 목격하기 때문이다. 특히 사회의 어른으로 모범을 보이고 중심을 잡아주어야 할 사회 유명인사들마저 탐욕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어 더욱 그렇다.

국회의장을 지낸 분은 손녀딸 같은 캐디에게 나쁜 짓을 했다가 그나마 괜찮은 정치인이었다는 평가를 한순간에 까먹고 말았다. 4월 총선 뒤 새누리당 고문 자격으로 여의도 식당에 들어서는 그의 행색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그런가 하면 평생 법조인으로, 만인의 삶을 저울질했던 전 대법관은 국회의원직을 기웃거리다 명예롭던(?) 인생에 흠집을 남겼다. 그뿐인가. 올해 94세인 롯데그룹 창업자는 인생 말년에 자신이 쌓아올린 대그룹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자충수를 두고 말았다. 수신은 물론이요, 자식들의 재산다툼으로 제가에도 실패해 바벨탑 같은 욕망의 고층빌딩은 붕괴되기 일보 직전이다.

모두가 물러섬을 모르고 오직 나아가려고만 하는 욕망의 그물에 걸려든 탓이다. 전 국회의장은 감각적 욕망을 제어하지 못했고, 전 대법관은 국무총리 낙마의 한을 풀기라도 하듯 쉼 없는 권력욕에 맑은 눈을 흐려버렸다. 그룹 총수 역시 재물에 대한 욕망을 끊어내지 못하고 인생의 끝을 망신과 패가로 덧칠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지난주 그림 대작 사건으로 기소당한 71세 조영남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노래면 노래, 방송이면 방송, 글이면 글 등 모든 분야에서 잘나가는 만능 엔터테이너였던 그는 남이 그려준 그림을 마치 자신이 그린 것처럼 사람들의 눈을 속였다. ‘나는 무엇이든 잘할 수 있다’는 자만심과 과시욕에 휘둘려버린 결과다.

때에 맞는 물러남과 욕망의 절제는 쉽지 않은 숙제다. 모든 존재는 끝없이 자신을 드러내려 한다. 사라짐은 공포에 가깝다. 그러나 존재의 유한성 역시 잘 알고 있다. 문제는 그걸 종종 잊어버린다는 데 있다. 그 망각의 밑자락에는 끝없이 솟아나는 욕망, 즉 탐심이 똬리를 틀고 있다. 더 오래 존재하려는 욕망, 더 가지려는 욕망, 더 예뻐지려는 욕망은 수시로 우리의 틈새를 비집고 올라온다.

현승종 전 국무총리와 안병영 전 부총리의 삶은 물러남의 아름다움, 욕망절제의 가치를 실천했다는 점에서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내가 누구인데, 내가 누구였는데라는 그 잘난 아상(我相)으로부터 자유를 쟁취했다는 데 그 가치가 있다 하겠다. 하여 노욕과 노추로 흐려져가는 오늘, ‘늙어서 경계해야 할 것은 탐욕에 있다(及其老也 戒之在得)’는 논어 경구와 금강경 속 ‘相(욕망)을 내려놓는 일’이 우리가 다시금 곧추세워야 할 삶의 화두는 아닐까.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