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장 대한민국

2016.10.23 20:49 입력 2016.10.23 20:51 수정

한때 막장 드라마가 유행이었습니다. 상상초월 반전과 극단적 관계 설정, 그리고 예상을 벗어난 결론에 이르는 드라마들이었습니다. 시청자들의 짜증 속에서도 꽤 괜찮은 시청률을 올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막장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간단하게 먹기 위해 허드레로 만든 된장이라는 말과 더 이상 나아갈 데가 없는 갱도의 마지막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막장 드라마의 ‘막장’은 후자를 지칭하는 게 맞을 듯합니다.

[아침을 열며]막장 대한민국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막장 드라마가 당시에 제작되고 방영된 이유는 뭘까요. 종편의 가세로 방송드라마 시장이 전쟁터가 됐다지만 방송작가 역시 정신적 산물을 생산하는 문학인일진대 시청률 하나에 자신들의 가치를 그렇게 내팽개칠 수 있을까요. 문학은 그 시대상을 반영합니다. 또 다가올 미래에 대한 예견과 변화상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마치 그들의 예견처럼 상상 속 드라마가 지금 현실에서 버젓이 상영되고 있습니다. 최근 50일 동안 세칭 민주공화국이자,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라는 이 땅에서 벌어진 막장 드라마의 제목만 열거해 볼까요.

김재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의 국회 해임건의안 통과와 대통령의 해임 거부, 그리고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의 목숨을 건 7일간의 단식, 경찰 물대포에 맞아 317일간 투병 끝에 사망한 백남기 농민의 사인을 둘러싼 지루한 공방,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 파문, 오락가락하는 사드 배치 지역 선정과 지역민들의 반발, 한진해운 처리 미숙으로 발생한 국가신뢰도 추락, 한국 경제 대표주자인 삼성의 갤럭시노트7 단종 등 굵직한 사건들이 쉼없이 터져 나왔습니다. 정상적인 국가라면 몇 년에 한 번 일어날까 말까 한 사건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고 해결도 되지 않은 채 또 다른 사건이 그 위를 덮치고 있습니다. 여기서 고려말 충선왕의 패륜을 지부상소(持斧上疏·목숨을 건다는 의미로 도끼를 들고 하는 상소)로 직언했던 기개와 절조의 상징인 ‘역동 우탁 선생’의 자손이라는 우병우 민정수석의 몰염치와 ‘찌질함’은 새삼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는 사이 박정희·전두환·노태우 군사독재정권으로부터 쟁취한 민주주의의 대의는 망가져 버렸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대의를 망가뜨려 버린 것이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 대통령임을 상기한다면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말을 절감하게 됩니다. 집권당 대표는 대통령 심기 살피기에 급급하고, 친박 의원들은 송민순 회고록 속 한 구절을 발췌해서 종북 매카시 놀음을 또다시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백남기씨 주치의 백선하 서울대 교수가 보여준 진실 외면과 다시 칼을 들이대 책임을 벗어나려는 경찰의 집요함은 참 뻔뻔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이들 중 최악의 막장은 최순실·정유라 모녀 주연, 차은택 연출제작인 K스포츠·미르 재단 드라마일 겁니다. 이 모녀는 박정희 이후 민주주의를 향해 조금씩이라도 전진해 온 우리 사회를 동시에 들었다 놓고 있습니다. 게다가 조연들의 면면까지 더하면 가히 ‘대하 막장 드라마’ 수준입니다. 청와대 정책조정수석과 고위관료들, 전경련 관계자와 굴지의 대기업 간부들 등 100여명에 달합니다. 여기에 지성의 전당인 대학교 총장과 교수들까지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사태가 이러함에도 막장 드라마의 진원지인 청와대는 특유의 유체이탈을 시도 중입니다. 지난 20일 박 대통령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의혹이 있다면 수사하면 될 것 아니냐”고 말하며 수사 가이드라인까지 쳤습니다. 참 무책임합니다. 자신 주변으로 인해 전 국민이 몇 달을 고통받고 있음에도 기껏 한다는 소리가 법대로 하라입니다. 그럼 검찰은 믿을 만한가요. 대통령은 검찰에 밀고, 검찰은 대통령의 눈치나 살피고 그렇게 해서 묻혀 버린 사건들이 한둘인가요.

이제 그는 한 국가의 대통령이 아니라 개인으로 전락한 느낌입니다. 레임덕이랄 것도 없습니다. 제대로 걸어 봤어야 레임(절뚝거림)이 있을 것 아닙니까. 이런 판국에 “오라 남으로”라며 대북방송이나 해대니 참 어이가 없습니다. 북한 주민들이 무더기로 넘어오면 감당할 수나 있습니까. 그런 준비를 갖추고 있기나 합니까. 거기다 시가에서 뺨맞은 며느리 친정 찾듯 툭하면 고향 구미를 찾아갑니다.

참 볼만한(?) 막장 드라마들이 메들리로 방영 중입니다. 언제까지 이런 막장 드라마를 지켜보아야 할지, 앞으로 남은 1년이 아득하게 느껴집니다. 그렇지만 머지않은 날에 온 가족이 함께 둘러앉아 편안하게 볼 수 있는 드라마들이 방영되리라는 기대의 끈은 놓지 말아야겠습니다.

빙하는 우리가 느끼지 못할 뿐 조금씩이라도 움직인다고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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