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니까!”

2016.09.25 21:05 입력 2016.09.25 21:07 수정

“내소사 다녀왔으므로 내소사 안다고 해도 될까/ 전나무 숲길 오래 걸었으므로/ 삼층석탑 전신 속속들이 보았으므로/ (…)/ 내소사도 나를 사랑한다고 믿어도 될까/ (…)/ 그가 붉은 단풍으로 절정의 시간을 지날 때나/ 능가산 품에 깃들어 고즈넉할 때는 나도/ 그로 인해 깊어지고 있었으므로/ 그의 배경이 되어주는 푸른 하늘까지/ 다 안다고 말하곤 했다/ 정작 그의 적막을 모르면서/ 종양이 자라는 것 같은 세월을 함께 보내지 않았으면서/ (…)/ 어찌 사랑이라 말할 수 있을까/ (…)/ 그의 기둥과 주춧돌 하나까지 사랑스러웠으므로/ 사랑했다 말할 수 있을까/ (…)/ 그의 흐느낌 그의 살에 떨어진 촛농을 모르면서” 시인 도종환이 자작시 ‘내소사’를 묵직하게 낭송했다.

[아침을 열며]“가을이니까!”

“고추씨 흔들리는 소리/ 한참 만에/ 에취!/ 바싹 마른 고추가/ 바싹 마른 할머니를 움켜쥐는 소리/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마당가 개도/ 취이!/ 마주 보는 주름살/ 다듬는/ 세월” 시인 함민복이 그가 지은 ‘가을 소묘’를 읽어나갔다. 시인의 입에서 나온 할머니의 재채기 소리 “에취~”, 개의 재채기 소리 “취이~”가 아주 실감난다.

지난주 토요일, 가을 색이 짙어가는 경기 양평의 북한강변 잔아문학박물관 잔디마당에서 열린 가을 시 낭송회를 찾았다. 등을 기댄 단풍나무 잎사귀가 노을에 물들어가는 때다. 귀로는 시를 듣고, 눈으로는 북한강 너머 서쪽 하늘을 즐겼다. 엉덩이에 깔린 시커먼 바위와 바위에 깔린 흙의 냄새가 났고, 입으로는 맑은 초가을 공기를 흠뻑 들이마셨다. 온몸의 감각이 날세워진다. 시 낭송회장 분위기가 울금꽃같이 부드럽고 감미롭고 신비스럽다.

얼마만이던가, 시 낭송회장을 찾은 것이. 허공을 가르며 살랑이는 작은 바람, 흔들리는 나뭇잎의 색깔들, 하늘과 구름을 온전히 맛본 것은 또 얼마만인가. 되새김질을 거듭하며 한 편의 시가 전하는 의미를 내 양분으로 삼아본 것은 또 얼마만인가.

여러 시인들, 문학평론가들의 낭송 목소리가 저마다의 지문처럼 모두 다르다. 그래, 목소리 지문이라는 성문을 손가락 지문처럼 시각화한다면. 지문과 성문은 다를까, 아님 똑같을까. 느닷없이 궁금해졌다.

이 공간을, 이 시간과 분위기를 한 폭의 그림으로, 한 곡의 음악으로 표현하면 어떨까 하는 엉뚱한 생각도 했다. 그러고 싶었다. 간만에 체감하는 참으로 다채로운 감정들, 전해져 오는 숱한 의미들, 그리고 하고 싶은 발언들이 너무 많다. 많이 넘쳐나기에, 다 담을 수 없기에, 화선지든 캔버스든 화면은 오히려 텅 빌 것 같다. 악보는 음표 하나 채워지지 않을 것 같다.

그러고보니 어떤 형상도 그리지 않은 텅 빈 캔버스를 미술관에 작품으로 내건 화가가 있었다. 붓질 한 번 하지 않은 작품을 만들고, 또 전시했으므로 로버트 라우센버그는 전시회를 날로 먹은 것일까. 그런데 빈 캔버스를 보면서 관람객들은 저마다의 그림을 그렸다, 아니 상상했다. ‘흰색 회화’를 출품함으로써 라우센버그는 오히려 관람객 숫자만큼이나 많은 작품을 빚어낸 것은 아닐까.

음표 하나 없는 악보를 만든 작곡가도 있었다. 피아니스트가 무대 위 피아노 앞에 앉지만 피아노 연주는 없다. 악보는 ‘무음’이라는 단어 외에는 비어 있으므로. 지휘자의 지휘봉도 당연히 연주회 내내 단 한 번도 움직이지 않는다. 피아노 연주 없는 피아노 연주회. 존 케이지도 연주회를 날로 먹어치운 것일까. 그런데 ‘침묵의 연주회’ 속에서 청중들은 저마다의 ‘음악’을 즐긴다. ‘음악’이라고 해도 될까 논란이 있다. 더 정확하게는 ‘소음’이다. 객석 어디선가 나는 연약한 헛기침, 의자 삐걱이는 소리, 옆 사람의 숨소리…. ‘소음 연주회’다. 케이지는 ‘4분33초’를 통해 과연 음악이란 게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고, 청중의 숫자만큼이나 많은 작품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닐까.

시 낭송회장은 비워지고 느려지는 여백의 공간이었다. 애써 챙기지 않아도, 급하게 가지려 하지 않아도, 팍팍한 시간을 내려놓은 것만큼 잊어버렸던 소중한 감성들이 저절로 들어찬다. 이게 바로 쉼의 미학이다. 2시간여 동안 제대로 쉬었다. 찌뿌둥하던 몸이, 부산스럽던 정신이 갈필만큼이나 담백하고 깔끔하고, 또한 깊이가 있다.

지난 뜨거운 여름, 열심히 일한 당신! 잠깐, 쉬었으면 좋겠다. 잊어버린 시를, 사람을, 사람 사이의 관계를, 사랑을, 그리고 잊어버린 감성을, 바람을, 하늘을 수확해 볼 수 있도록. 가을은 수확하는 철 아니던가. 음악회와 전시회, 낭송회, 크고 작은 공연 등 수많은 문화예술 행사가 전국 곳곳에 마련되고 있다. 참여해 즐기고, 또 쉬어보자. “왜냐”고. 시인들은 말했다. “가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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