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월드컵 ‘제비뽑기’

2001.12.01 22:57

로마 점령군에 포위당한 채 성안에서 3년간이나 버티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마지막에 택한 방법이 제비뽑기였다. 적국의 노예가 되어 능멸당하느니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한 것이었다. 열명씩 모여 한명이 아홉명을 죽이는 방식으로 ‘죽음의 의식’이 이어졌으며, 그런 식으로 최후에 남은 한사람도 결국 성에 불을 지르고는 자결하고 말았다. 지하에 숨어 있던 어린 아이와 부녀자 몇명을 제외하고 성을 지키던 960여명이 의연히 죽어간 ‘마사다 비극’의 전말이다.

이밖에도 제비뽑기에 대해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수두룩한 얘깃거리가 전한다. 길흉화복을 점치거나 사람의 지혜로 가리기 어려운 사안이 닥칠 때는 으레 제비를 뽑았다. 고대 그리스의 집정관이나 원로원 의원들이 대부분 추첨으로 선출됐는가 하면,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에도 제비뽑기로 궤짝을 골라 신부감을 찾는다는 얘기가 소개되어 있다. 여호와가 모세에게 ‘약속의 땅’을 제비를 뽑아 나눠주도록 했다는 성경 내용을 보면 그 결과를 신의 섭리 또는 계시로 받아들였음을 보여준다.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조차 이런 방식이 채택되고 있는 것은 흥미롭다. 지난해 조지 W 부시, 앨 고어 후보가 마지막 접전을 벌였던 플로리다주의 경우 최종 득표가 같을 경우 동전 던지기로 승자를 가리도록 규정되어 있다는 얘기다. 이러한 규정에 따라 제비뽑기로 마지막 승자를 가렸던 전례도 없지 않다니, 그야말로 ‘행운의 여신’이 자신을 향해 웃어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언젠가 일본 도쿄(東京)대에서도 총장 결선투표에서 제비뽑기로 총장을 결정한 경우가 있다.

어제 저녁, 세계 축구팬들의 눈길이 쏠린 가운데 부산 전시컨벤션센터에서 월드컵 조추첨 행사가 열렸다. 추첨 항아리에서 구슬이 하나씩 꺼내질 때마다 지구촌에 온통 환호와 한숨이 교차할 만큼 열기가 가득했다. 대나무통에 들어 있는 가느다란 몇개의 점술 막대기가 인간사를 좌우했듯이 21세기에 들어서도 제비뽑기가 인류를 웃기고 울린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시켜 준 셈이다.

〈허영섭 논설위원 gracia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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