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갑을관계 

2011.10.30 21:06
노응근 논설위원

60갑자(甲子)는 천간(天干) 10개와 지지(地支) 12개의 조합으로 이뤄진다. 천간은 하늘의 시간적·계절적 기운 흐름을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로, 지지는 땅의 기운 흐름을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라는 문자로 각각 표현한 것이다. 10천간이든 12지지든 대자연의 기운 흐름을 순서대로 나타내고 있을 뿐, 우열·서열 개념은 포함하고 있지 않다. 차례대로 끝없이 순환하는 봄, 여름, 가을, 겨울에 더 낫고 못함이 없는 것과 같다.

‘갑을관계’는 이런 의미의 10간에서 유래했으나 뜻은 영 딴판으로 쓰이고 있다. 계약서상 계약 당사자를 단순히 ‘갑’과 ‘을’로 지칭한다지만, 관용적으로는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은 쪽을 갑, 낮은 쪽을 을이라 부른다. 양자 관계에서 상대방의 생살여탈권을 쥔 강자가 갑이라면, 살기 위해 목숨을 구걸해야 하는 약자는 을이다. 서류상에만 갑을관계일 뿐, 실질적으로는 상하관계, 주종관계다.

갑을관계의 을보다 더 못한 약자를 ‘병’이라 한다. 대기업을 기준으로 1차 협력업체가 을이라면, 2차, 3차 협력업체는 병이다. 을은 직접 하청을 주는 병과 또 다른 갑을관계를 형성한다. 병은 대기업보다 1차 협력업체를 더 무서워할 수밖에 없다. 갑을관계가 먹이사슬처럼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갑을병관계에서 ‘갑을병’은 힘이 강한 순서를 나타낸다. 이런 10천간의 우열 개념은 일제시대 때 초등학교 성적 표시에도 활용됐다고 한다. 성적을 ‘갑을병정’ 식으로 표시했다는 것이다.

세간에는 갑도 을도 아닌 ‘병의 입장’도 있다. 때로는 갑 입장, 때로는 을 입장이 되는 사람을 일컫는다. 상대방에게 뭘 요구하면서도 상대방의 부탁도 들어줘야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갑을관계에서처럼 갑이 을에게 일방적으로 힘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갑과 을이 힘의 균형을 이룬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최근 동반성장이 강조되는 것은 대기업과 협력업체간 갑을관계의 폐해가 그만큼 심각하기 때문이다. 1%의 갑의 횡포에 99%의 을이 숨죽이고 있다는 말도 나온다. 재벌 총수는 앞다투어 “협력사와 갑을관계는 없다” “갑을관계의 낡은 생각을 버려라”고 외치지만, 본말이 전도됐다. 현실에서 대·중소기업 간 진정한 동반자 관계가 정립되면 갑을관계란 말은 자연스레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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