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연판장 

2011.11.08 20:56
노응근 논설위원

연판장(連判狀)이란 여러 사람이 의견이나 주장을 밝히기 위해 연명으로 작성한 성명서, 건의서 등 문서를 말한다. 연판 방식은 보통 각자 이름을 쓰고 도장이나 지장을 찍는다. 손가락의 피로 서명해 연판의 의도를 더 강하게 드러내는 혈판장도 있다.

연판장 작성은 조직에서 ‘아래로부터의 개혁’을 외치는 집단행동인 경우가 많다. 흔히 하극상이나 항명으로 비쳐져 물의만 빚고 끝나기도 하지만, 큰 효과를 낼 때도 있다. 1988년과 1993년 일선 판사들이 사법개혁 등을 요구하는 연판장을 돌려 당시 대법원장 사퇴를 포함해 상당한 성과를 거둔 두 차례의 사법파동이 대표적이다. 군에서는 5·16 군사쿠데타의 주체세력이 된 소장 장교들이 한 해 전인 1960년 당시 군 수뇌부에게 3·15 부정선거와 군내 부정부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퇴진할 것을 요구하는 연판장을 돌리려다 발각돼 큰 파문을 일으킨 적이 있다. 연판장은 미수에 그쳤지만, 그때의 ‘의기투합’이 쿠데타 성공에 큰 힘이 됐을 것이다.

옛날에는 연판장이 돌면 조직의 권력자가 주동자를 철저히 가려내 처벌했다. 지금도 알게 모르게 그럴지도 모른다. 일본 전국시대에는 농민들이 연판장 등을 통해 지배세력에게 항거했다. 당시 권력자는 농민들의 요구가 합당해 받아들이더라도 주동자를 반드시 처형했다. 그러자 농민들은 주동자가 누군지 알 수 없게 참여자 이름을 방사상으로 쓴 ‘가라카사(종이 우산) 연판장’을 작성했다. 조선 후기, 특히 동학농민혁명 때 사발을 엎어 그린 원을 중심으로 참가자 명단을 빙 둘러가며 적은 사발통문(沙鉢通文)도 그런 사례다.

항명이나 하극상이 아니라 청원 성격의 연판장도 있다. 1980년대 중반 군사독재 시절 제비족이 얼마나 날뛰었던지 중동의 근로자 수백명이 법무부 장관에게 ‘제비족 좀 뿌리 뽑아 달라’는 내용의 연판장을 보내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다.

한나라당 소장 혁신파 25명이 얼마 전 이명박 대통령에게 여권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대국민 사과와 국정 기조의 근본적 변화를 촉구하는 서한 형태의 연판장을 발표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침묵하고 있다. 옛말에 눈이 있어도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고, 귀가 있어도 듣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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