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숫자 정치

2019.10.01 20:55 입력 2019.10.01 20:56 수정

“얼마나 왔나?” “광장은 찼나?” 1990년대 초 대선·총선 유세 현장에 가면 가장 먼저 신문사에 전화로 알리는 게 있었다. 어림짐작한 참석자 규모였다. 여의도광장 100만, 보라매광장 80만 식으로 정치부에 내려오는 ‘기준값’이 있고, 광장이 넘쳤는지 골목까지 흘렀는지에 따라 숫자가 가감됐다. 1987년 대선부터 불붙은 ‘1노3김의 광장정치’가 한창이던 시절이다. 박정희·김대중이 승부한 1971년 대선 때는 상대적으로 작은 서울 장충단공원도 ‘100만 인파’ ‘우리가 더 많았다’고 기싸움을 벌였다. 유세 인파가 세 과시 잣대와 뉴스가 되고, 구전 홍보가 중요할 때였다. 선거판의 설전은 1990년대 후반 TV토론과 여론조사에 밀려 멈췄다.

광장의 숫자가 다시 초점이 된 것은 촛불이다. 정점은 2016년 12월3일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촛불문화제였다. 주최 측 발표 232만, 경찰 추산 43만명 모두 신기록 인파였다. 경찰은 한 평(3.3㎡)에 9명이 서 있고 5명이 앉아 있다고 세는 페르미룰을 원용했고, 광장 주변 지하철 이용객 수와 통신량이 빅데이터로 참고됐다. 흥미로운 것은 그해 10월29일 1차 촛불(주최 측 5만, 경찰 1만2000)부터 경찰 추산에 4~5배를 곱하면 대체로 주최 측 숫자가 되는 ‘촛불 공식’이 이어졌다. 어차피 정확히 셀 수는 없고, 추세는 똑같이 보여준 셈이다. 얼마나 정쟁에 휩쓸리고 스트레스를 받았던지, 경찰은 2017년 1월 집회 참석자 발표를 중단했다.

서초·반포대로 1.6㎞를 메운 9·28 검찰개혁 촉구 촛불을 두고 숫자 공방이 또 거칠다. 주최 측 추산은 80만에서 200만까지 여러 층이고, 5만으로 추정한 자유한국당은 1일 통계 전문가를 초청한 간담회까지 열었다. 사람들이 보는 경험칙은 그 사이 어디쯤일 테다. 언제부턴가 촛불은 누가 주도하고 교통비를 주는지로 성격이 갈린다. 부풀리고 깎는 숫자 대치는 여도 야도 정략이 앞설 때가 많다. 태풍이 부는 3일 광화문 집회에 당원 동원령을 내린 한국당의 높아진 목표치도 150만명. 서초동 촛불을 5만으로 보고는 쉽잖은 숫자다. 기억 속의 어머니가 장독대나 시루떡에 올려놓은 촛불의 힘은 간절함이다. 한명이든 100만명이든 촛불은 크기만 다를 뿐이다. 가리키는 달(민심)을 보라는 게 촛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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