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속으로]“독도 영유권 뒷받침할 자료 확보해야”

2006.05.21 17:47

0과 1이 지배하는 디지털 시대다. 디지털의 특징 중 하나는 영상이든 텍스트든 순식간에 원본을 그대로 복사할 수 있다는 것과 대량생산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그 세상의 시간은 무척 빠르다. 생산성과 경쟁력이 미덕이다. 전 사회가 여기에 매달리며 뒤처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론 허전하다. 우리가 뭔가 잊고 지내는 것은 아닌지….

[사람 속으로]“독도 영유권 뒷받침할 자료 확보해야”

시대가 아날로그 세상에서 디지털 세상으로 변하든, 20세기에서 21세기로 변하든 우리 사회에서 챙겨야 할 것들이 존재한다. 가령 예를 들어 경륜(經綸)이란 건 급조할 수 없다. 대량생산할 수도 없다. 돈을 준다고 바로 얻을 수도 없다. 고서(古書)도 마찬가지다. 돈으로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디지털 시대, 급격한 변화를 좇다 간과한 부분이 바로 이런 것 아닐까. 다행히도 디지털 시대,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것들에 관심을 쏟는 이가 있다. 유영구 한국관계고서찾기운동본부 위원장(60·명지학원 이사장). 그는 교육사업가로도 탁월한 능력을 인정 받고 있지만 아무래도 옛자료 수집가로서의 행보가 더 돋보이는 것 같다.

최근 일본이 다시 독도에 대해 ‘한국이 불법점거하고 있다’ ‘국제사법재판소 회부를 거부할 수 없는 환경으로 만들어야 한다’ 운운하며 음흉한 속내를 드러내고 있는 가운데 차곡차곡 역사적 자료를 마련하며 연구 토대를 다지고 있는 유위원장을 만나 보았다.

서울 서소문동 명지빌딩 20층 명지학원 이사장실은 한국관계고서찾기운동본부 위원장실이기도 하다. 그 맞은편에 위치한 LG연암문고는 한국학 연구의 ‘보고(寶庫)’다. 유위원장이 지난 10여년간 세계 곳곳을 뒤지며 발품을 팔아 수집한 한국 관계 고서가 보관되어 있다. 16세기부터 20세기 후반 서구인이 쓴 책과 중국·일본·러시아의 한국학 책에 이르기까지 1만2천여종의 책과 2,500여종의 마이크로 필름이 바로 그 ‘보물’이다.

최근 명지대-LG연암문고 10주년 기념 특별전 ‘코레아 견문록’ 전시회를 마친 유위원장은 마치 해야 할 숙제 하나를 마무리한 듯한 표정이었다. 돌아보면 지난 10년은 그에게 엄청 소중하고 보람된 세월이었다. 1995년 광복 50주년이 되던 해, 그는 한국 관계 고서를 모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관련 전공 교수들과 무려 300쪽에 달하는 계획서를 만들어 구본무 LG 회장을 찾아갔다. 학교 예산은 학생들을 위해 써야 하니 한국 고서 수집을 지원해달라고 했다. 구회장은 흔쾌히 지원을 약속했다. 1년에 2억원씩이나. 그래서 LG연암문고를 만들고 명지빌딩에 ‘보물창고’를 만들 수 있었다.

지난 10년간 영국·프랑스·독일 등 유럽의 고서점을 많이도 뒤졌다. 세계 200곳 이상의 고서점과 통하는 그는 고서점 자체도 역사를 담고 있는 곳이라고 했다.

영국·프랑스 등의 고서점들은 대개 문을 연 지 100년이 넘은, 말 그대로 고서점이다. 주인들도 3~4대를 이어 오고 있는 곳이 대부분이며 해당 분야에 박식한 박사들이 대부분이다. 이들과 ‘인연’을 다진 결과 꽤 뿌듯한 수확도 올렸다. 96년 조선을 서양에 최초로 알리는 계기가 된 하멜 표류기의 서양어 초판본 수집. 1668년 네덜란드어판, 1670년 프랑스어판(2판본), 1672년 독일어판 등을 확보했다. 천주교 선교사 아담 샬의 회고록(1665년 발간, 중국 베이징에서 병자호란 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온 소현세자를 만나 집필)을 구할 수 있었던 것도 복이라고 생각한다.

“고서를 수집하다보니 점점 운명론자가 되는 것 같아요. 책에도 임자가 있다는 거지요. 어떤 책은 구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손에 들어오지 않고 어떤 책은 전혀 생각지도 않았는데 ‘굴러’ 들어오는 경우도 있어요. 예를 들면 스페인 선교사 루이 프로이스가 임진왜란이 끝난 해인 1598년에 쓴 ‘감바쿠도노의 죽음’이란 책도 그에 해당되지요. 당시 일본 나가사키에 선교사로 나가 있던 프로이스가 임진왜란 당시 쓴 참전기인데 이런 책이 있는 줄 전혀 몰랐는데 한 고서점 주인이 보여줘 얼른 샀지요.”

그는 책에는 일본이 일으킨 전쟁은 전혀 명분이 없는 조선침략이라고 철저하게 비판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며 이와같은 책들이 모이면 우리 역사에 커다란 명분을 쌓는 거와 다를 바 없는 것 아니냐고 강조했다.

그는 98년 한국국가기록연구원 설립을 주도, 99년 이사장에 취임해 국가 기록의 수집·보존·활용에 관한 법률을 입법화하는 데 일조를 하기도 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99년 명지대에 기록과학대학원을 설립, 관련 전공자를 양성해 오고 있다.

그는 고서뿐 아니라 고지도 수집에도 적극적이다. 지금까지 세계지도 1호인 마테오리치의 ‘곤여만국전도’, 1735년 프랑스의 지도 제작자 당빌이 그린 ‘조선도’ 등 100여장의 귀중본을 모아놓았다.

“세계지도엔 당시의 세계관이 담겨 있어요. 당시 세계가 한국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죠. 예를 들면 서구가 대항해를 시작한 후 1600년대 제작된 지도에는 한반도가 섬으로 표시되어 있죠. 그러다 중국 끝에 붙은 고구마 모양으로 그려지기도 했습니다. 1700년대에 가서야 겨우 오늘날 모양과 비슷하게 나타나죠. 당시 우리는 서구를 몰랐지만 서구는 분명 우리를 보고 있었다는 걸 지도를 통해 알 수 있는 거죠.”

첨단 디지털 시대에 왜 하필이면 고서, 고지도에 관심을 두게 됐을까.

“과거 역사를 논할 때 ‘자료’가 없으면 명분도 군색해지고 목소리를 아무리 높여도 힘이 실리지 않아요.”

최근까지 우리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는 독도문제에 대해서도 ‘자료 확보’를 강조했다. 일본은 100년 전부터 자기네 영토라고 우기면서 자료를 확보하고 있다며 우리도 흥분만 할 게 아니라 과학적, 학문적 영유이론을 뒷받침할 만한 자료를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고서점의 한 귀퉁이에 처박혀 있는 고서를 발굴하는 것은 수백년 쌓인 과거의 시간 속에서 역사를 캐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 역사는 단순한 자료가 아니라 ‘세계 속의 한국’이라는 국가적 자화상을 짜맞추는 모자이크 조각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 조각을 많이 찾을수록 우리의 자화상은 풍성해지고 한국학의 지평은 넓어질 것입니다.”

그는 이같은 작업은 디지털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강조했다. 디지털 시대에 진입하며 속도와 효율만 강조하다보니 마치 본래의 주제는 사라져 버리고 방법론만 득세하는 것 같다며 너무 한쪽에 치우치다보면 다른 한 부분이 결여되는 것 아니냐고 했다.

그랬다. 디지털 시대, 대다수가 자기경쟁력 강화에 매달리고 있을 때 그는 ‘역사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이 시간이 아니면 돈을 아무리 들여도 구할 수 없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늘리기 위해 그는 아날로그족으로 발품을 팔고 다니고 있는 것이다.

그 아날로그적 지향은 새로운 꿈으로 확대되고 있다. 지도전용박물관과 사진사박물관을 세우는 것. 한국사진사연구소를 인수해 확보한 한국 근·현대사 관련 사진 3만여점을 정리하는 것도 앞으로 해야 할 일이라고 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술·담배도 안 하고 골프도 안 하는 그에게 고서, 고지도 수집은 취미라기보다 ‘디지털 시대 아날로그적 수행’에 가까울 것 같다. “살아가며 즐기는 취미는 없냐”고 말문을 돌리자 커피에 상당한 매력을 느낀다고 했다. 커피를 직접 볶고 갈아서 맛을 볼 정도로 마니아다.

〈인터뷰/이동형 매거진X 부장 s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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