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

2011.02.09 21:11

“공비 소탕” 어린이 등 719명 살해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에서 1951년 2월9일부터 11일까지 한국군에 의해 민간인이 대량학살된 사건이다. 공비를 소탕한다는 명목 하에 15세 이하 어린이 359명을 포함해 민간인 719명이 살해됐다.

당시는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군과 남한 출신의 빨치산들이 지리산을 거점으로 게릴라전에 돌입한 상황이었다. 이승만 정부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토벌군인 국군 11사단을 창설했으나,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신원면에서 빨치산을 몰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51년 2월 초, 소속사단의 9연대 3대대 본대가 빨치산의 기습공격으로 거의 전멸하다시피 하자 당시 대대장이던 한동석 소령은 이를 갈며 병력을 이끌고 신원면의 민가에 들이닥쳤다. 가옥에는 불을 지르고 가축과 양식을 약탈한 뒤 주민들을 모아놓고 총기를 난사해 살해했다. 희생자들의 시신 위에는 나뭇가지를 덮고 기름을 뿌린 뒤 불로 태워 증거를 인멸했다. 백설이 덮인 논과 계곡은 피바다가 되고 마을은 불바다가 됐다. 이들은 계엄령까지 내리며 학살 소식을 감추려 했지만 감춰질 일이 아니었다. 그해 3월, 국회 본회의에서 거창 출신의 신중목 의원이 학살 사실을 폭로했다. 국회와 내무·국방부는 합동 진상조사단을 구성했다. 소식을 들은 군은 진실은폐에 급급했다. 학살현장에서 어린이 사체를 골라내서 현장에서 2㎞ 떨어진 홍동골 계곡으로 옮기고 군병력 중 일부를 공비로 가장시켜 마을 어귀에서 조사단에게 총격을 가해 현장 접근을 막았다.

하지만 진실규명 여론이 높아지면서 그해 12월 대구고등군법회의에 학살의 당사자들이 서게 됐다. 해당 연대장은 무기징역, 대대장은 징역 10년형, 학살을 현장지휘한 소위는 무죄 등을 선고받았다. 솜방망이 처벌에 유족들의 한은 더욱 깊어질 뿐이었다. 게다가 이들 모두 1년여 만에 석방되거나 복권·복직됐다.

[어제의 오늘]1951년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

박산 골짜기에 방치된 죽은 가족들의 시신을 수습하는 데에도 3년이나 걸렸다. 이승만 정권의 은폐공작 탓이었다.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어 큰 뼈는 남자, 중간 뼈는 여자, 작은 뼈는 어린이로 구분해 화장한 후 박산에 안장하고 60년에야 묘역에 위령비를 세웠다.

61년 들어선 박정희 군사정권은 이들 유족도 빨갱이로 몰았다. 유족회 간부 17명은 반국가단체 혐의로 구속됐고, 박산묘소는 파헤쳐졌으며 위령비문은 정으로 지워져 땅에 파묻혔다. 유족들이 봉분을 다시 원상복구해달라고 각계에 호소한 끝에 67년 봉분만 복구됐고, 88년에서야 유족들이 위령비를 다시 파낼 수 있었다. 거창사건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통과된 것은 95년이 되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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