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직후사로 ‘한국의 원형’ 규명, 정병준 교수
친미·반공·기독교 기준 통해 이승만·한민당과 동맹 맺고 중대한 결정
하지, 통역관 윌리엄스와 이묘묵 말에 의존…결국엔 분단과 냉전 촉진
여운형엔 정치공작, 김구엔 통제·감시…모든 것을 이승만에 몰아준 셈
점령군이 특정 정파와 결탁 과도정부 꾸려…미국 고위급 정책과도 배치
내년이면 해방 80년이 된다. 거리를 두고 냉정하게 바라볼 때도 됐지만, 해방 직후 역사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뜨겁다. 기본적 질문들이 명쾌하게 답변되지 않은 것도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가령 패전국이 아니었던 조선은 왜 2차 세계대전 후 분단되어야 했을까, 왜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되지 않고 식민지 조선에서 대한민국으로 넘어갈 수 있었을까 같은 것들이다.
정병준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58)는 최근 <1945년 해방 직후사>에서 그 답의 일단을 제시했다. 그는 해방 직후 미군정하에 이뤄진 “중대한 결정”이 현대 한국의 원형(原型)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1945년 8월부터 그해 말까지 미군정이 친미·반공·기독교·서북 출신·연희전문학교 등의 기준으로 선별한 우익 인사들에게 불하(拂下)한 ‘벼락 권력’이 핵심이다. 권력이 대의성이나 합법성, 민주주의 원칙이 아니라 미군정에 의해 불하됐고, 이에 따라 구축된 미군정-이승만-한민당 동맹이 나라의 앞날을 규정했다는 것이다. 신생 국가의 출발점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어떻게 그 짧은 기간에 벌어진 일이 나라의 향후 80년을 좌우했다는 것일까.
“우리가 개입할 수 없는 곳에서 이뤄진 중대한 결정”에 대해 당시 사람들은 물론이고 후대 역사가들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시간이 흐른 것과 관계있을 수 있다. 특정 이념이나 이론에 좌우되지 않고 철저히 사료를 통해 말해온, 이 성실한 역사학자가 40년 가까운 공부의 ‘유레카’를 외친 이유를 지난 5일 만나 들어봤다.
- 1945년 8~12월의 세밀화를 그려냈는데요. 해방일부터 얘기해볼까요.
“8월15일이 일본 패망일이지만, 사실 그날은 아무 일도 없었어요. 이튿날 서대문형무소 정치범 석방과 안재홍의 경성방송국 연설로 비로소 해방공간이 열렸습니다. 여운형과 조선총독부의 교섭으로 8월16일 2000여명의 독립투사들이 석방돼 종로까지 걸어가는데 일본 군이나 경찰이 아무도 없는 거예요. 비슷한 시각 안재홍은 라디오를 통해 ‘총독부의 허가하에 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만들어졌고 우리가 앞으로 군대도 만들고 치안 유지도 한다’고 말했어요. 그 순간 전국의 행정이 마비됐어요. 총독부는 대중적 영향력이 있는 여운형에게 치안 유지 협조를 요청했을 뿐, 그런 상황을 의도하진 않았어요. 집회·결사 자유가 주어졌고, 자유롭게 의견이 개진됐어요. 종전 이후를 준비한 여운형과 건준 덕분입니다. 그게 없었다면 9월6일 미군정이 들어올 때까지 일제 강압통치가 지속됐을 거예요. 송진우와 한국민주당(한민당)은 대책 없이 시세 추종적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어요. 오히려 건준을 치안유지회로 되돌리려는 총독부 공작에 열성적으로 가담했죠.”
“독특한 자생 권력” 건준은 한민당의 공격과 총독부의 공작 등으로 흔들리면서도 미군 진주에 즈음해 조직을 확대해 조선인민공화국(인공) 창설로 나아갔다.
- 그러던 중 미군이 들어왔죠. 계획이 있었습니까.
“백지나 다름없었지만 일정한 판단은 갖고 있었죠. ‘우리는 호의를 갖고 있고, 한국인들은 자치할 능력이 없다. 그러니 우리 결정에 따라야 한다’는, 선의에 입각했지만 인종차별적 관점이었어요. 미군정은 일본을 미숙한 청소년으로 봤으니 조선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겠죠. 문제는 점령군사령관 존 하지가 일본·독일·이탈리아에 파견된 다른 사령관들과 달리 현지 사정을 모르고 영향력도 없는 인물이었다는 거죠. 그는 맥아더 밑의 여러 장군들 중 하나였습니다. 그렇다면 적절한 정치고문을 붙이거나 본국 지침을 자세히 줘야 하는데 그러지도 않았어요. 미국이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낮게 봤다는 의미입니다.”
- 그런 상황에서 백지를 채운 것은 누구인가요.
“미군정이 ‘보수적이고 좋은 교육을 받고 신뢰할 만하다’고 표현한 한민당 사람들입니다. 한민당은 건준·인공을 만든 여운형에 대해 온갖 모함을 할 준비가 돼 있었어요. 마침 등장한 미군이 놀랍게도 이 사람들 말을 다 들어준 거죠. 주목할 인물은 하지의 통역관이자 고문인 조지 윌리엄스입니다. 그는 군의관 출신으로 미국 내에서는 ‘아무도 아닌 자’였지만, 하지의 문고리 권력으로 사실상 정책 결정자 역할을 했습니다. 선교사의 아들로 15년 동안 한국에서 살아 한국어에 능했습니다. 윌리엄스가 1946년 1월 미국 감리교 선교단 앞에서 했던 연설문을 보고는 미군정 초기 벌어진 많은 비밀들이 해결됐습니다. 대표적으로 그는 친일 경찰을 비호한 조병옥이 입에 달고 살던 ‘한국인들은 목구멍이 포도청이었지 친일은 없었다’는 말을 그대로 해요. 모든 한국인들이 살아남기 위해 일본에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는 ‘국민공범론’을 되풀이했어요.”
정병준은 이묘묵이라는 하지의 한국인 통역관도 주목했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연희전문 교수를 지낸 이묘묵이 9월10일 연합군 기자단 환영식에서 “여운형은 친일파이자 공산주의자로 총독부의 돈을 먹고 친일정부를 수립했다”는 연설을 했다. 사실이 아니었지만, 하지에겐 통했다. 이들의 영향으로 “친일이냐 항일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얼마나 미국이 바라는 대로 친미적이고 친기독교적이고 반공주의적이냐가 중요하다는 인식이 심어졌고, 진주 2주 만에 미군정이 한국을 보는 기본틀이 만들어졌다”. 문제는 그것이 미국의 고위급 정책은 물론이고 당대 한국인들의 여망과도 배치됐다는 점이다.
하지는 한 달 만에야 여운형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일본놈들로부터 돈을 얼마나 받아먹었지?”라는 모멸적 말을 건넸다고 한다. 미군정은 그해 12월12일 인공을 불법화했다. 하지만 서울대 초대 총장 알프레드 크로프츠와 국무부의 사후 평가에 따르면 인공은 공산주의 조직이 아니라 아프리카의 탈식민지 정권 정도의 성격이었고, 미국이 인공을 활용했어야 한다는 비판이 나왔다. 당시 미군정 입장은 반인공에 그치지 않고 친임시정부(임정)를 추구하며 입지를 더 좁혔다. 한민당 인사들의 조언에 따라 대다수 한국인이 인공에 반대하고 임정을 지지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부정확한 평가였고, 특정 정파 편을 들지 말라는 본국 지침도 어긴 것이라고 정병준은 말했다.
“한민당은 정통성이 없으니까 임정 지지를 표방하고는, 하지의 귀를 붙잡았어요. 그런 한편 엽관운동을 했어요. 미군정이 1945년 말까지 임명한 한국인 관리 수가 7만5000명에 달해요. 대부분 추천에 의했는데, 일제하 한국인 관리가 남북한 통틀어 3만명이 안 됐던 걸 고려하면 엄청난 숫자죠. 이묘묵처럼 서북 출신에 연희전문 배경인 정일형 미군정 인사행정처장의 권한은 막강했어요. 총독부 출신 친일 관리와 행정 경험이 없는 그 밖의 친일파와 무자격자들이 벼락 권력을 거머쥐었어요. 대체로 친미·반공·기독교·서북 출신·연희전문학교라는 공통점을 추출할 수 있어요. 이들은 당시 민의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고, 어떠한 정통성도 갖지 못한 관료들이었어요.”
미군정은 임정 인사들의 귀국을 서둘렀고, 이승만 중심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중협) 결성으로 과도정부 계획을 구체화했다. 정병준은 그 과정에 알려지지 않은 반탁운동이 있었던 점에 주목했다.
“지금까지 통념은 1945년 12월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신탁통치가 결정된 뒤 김구와 임정 인사들이 격렬한 반탁운동을 전개했다는 것이죠. 사실은 그 전에 미군정이 주도한 이승만과 한민당의 반탁운동이 있었습니다. 이승만과 한민당은 12월 모스크바 회의 폐막을 앞두고 뜬금없이 반탁 성명을 냈어요. 이승만은 이 회의에서 신탁통치 결정이 날 것을 알았던 몇 안 되는 사람이었어요. 미군정은 본국 방침과 반대로 임정을 중심으로 자문기구를 확대해 과도정부만 만들면 된다고 봤어요. 김구의 반탁은 미군정 타도까지 나가니 통제해야 했지만, 미군정이 관리 가능한 이승만의 반탁은 독려한 거죠. 미군정으로선 임정만 들어오면 모든 정당과 정파가 통일된다고 순진하게 생각한 거죠. 그런데 이승만과 한민당은 임정의 정통성만 활용하려 했을 뿐 손에 들어온 권력을 나눌 생각이 없었죠.”
당연히 하지의 계획은 실패했다. 좌파·중도파는 물론 우파인 김구도 들러리 서지 않겠다며 독촉중협에 불참한 것이다. 이로써 미군정은 1943년 카이로선언 후 미국의 공식적인 대한정책인 다자간 신탁통치 계획을 부정하는 궤도에 올랐다. 미·소 냉전이 1947년 3월 이후 분명해진 걸 감안하면, 하지는 너무 앞서나간 셈이었다. 오랜 전쟁에 지친 병사들을 이끈 사령관으로서 한국 조기 철군을 목표로, 빠른 정부 수립을 위해 반공주의적 정책을 강화하려 했을 수 있다고 정병준은 봤다.
- 1946년 5월이면 흐름을 되돌리기 어려워졌다고요.
“미군정은 이 시점에 중요한 정치적 결정을 했습니다.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조선공산당을 불법화했어요. 실물 위폐를 증거로 제시 못하면서도 위조액이 1300만원에 달한다고 주장했어요. 여운형에 대해선 동생 등을 활용한 정치공작으로 끌어내렸어요. 반면 이승만에겐 불법 대출을 통해 정치자금을 1000만원이나 줬어요. 이승만 방미를 위한 불법 강제모금·환전도 묵인했고요. 김규식은 300만원의 정치자금을 지원했어요. 이승만에게 1000만원 더하기 특혜, 김규식에게 약간의 립서비스와 300만원, 여운형에게 0원 더하기 정치공작, 김구에게 0원 더하기 통제·감시, 박헌영에겐 마이너스 1300만원인 거죠. 그 여파가 1946년 9월 총파업, 10월 대구폭동으로 폭발했어요. 결국 박헌영은 월북하고, 미군정은 굳이 붙잡지 않았어요. 굉장히 공작적이죠. 그렇게 미군정에 의해 무대 칸막이가 쳐졌고, 모든 것을 이승만에게 몰아주게 됩니다.”
아이러니는, 1946년 11월 미국을 방문한 이승만이 ‘하지는 빨갱이’라고 매도한 것이다. 미군정이 표방한 좌우합작에 불만을 품고 자신을 만들어준 은인을 배신한 것이다. 정병준은 “이승만의 권력 의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캐릭터를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했다. 하지는 뒤늦게 서재필, 김규식을 세우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남한의 행정권력과 우파 조직을 모두 이승만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병준은 “특정 정파와 결탁해 점령군이 마음대로 과도정부를 꾸린 일은 미국이 점령한 일본이나 독일, 이탈리아에서는 상상도 못한 일”이라며 “한국에선 그런 일이 버젓이 일어났고, 그게 잘 감춰져 왔다는 점에서 한국이란 국가가 가진 비감한 처지를 보여준다”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잘 감춰졌던 “비밀의 화원”이 드러났다. 그런데 세계가 냉전으로 가고 있었다는 점에서 윌리엄스나 이묘묵 같은 사람들이 한 역할을 과도하게 해석하는 것은 아닐까.
“윌리엄스와 이묘묵 같은 이들은 미군정이 듣고 싶어 하는 얘기만 해줌으로써, 작은 실수와 큰 실수 사이에서 그것을 큰 실수로 몰아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어요. 사실 그렇게까지 어긋나서 엉망진창 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가령 지방에서는 인공이나 인민위원회에 대해 우호적인 곳들이 꽤 있었어요. 전남 같은 곳에서는 행정이나 치안도 잘 유지되고 민심도 좋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하지가 인공 부정 성명을 낸 뒤로 분위기가 싹 바뀌어서 경찰이 폭력 진압을 시작한 거죠. 틈이 갈라지는 순간엔 각도가 미묘했지만, 1946~1948년이 되면 현저한 격차가 생기게 된 거죠.”
- 결국 그게 분단과 냉전을 촉진했다고 봐야 할까요.
“그렇게 봅니다. 그때는 아직 냉전이 정책으로 구체화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어요. 하지가 행한 일이 1946년 한국 상황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고, 결국 1947년 이후 전지구적 냉전이 본격화하는 데도 영향을 줬습니다. 브루스 커밍스가 하지를 ‘미숙한 냉전용사’라고 부른 것이 바로 그런 차원입니다.”
- 요즘 보수진영의 이승만과 건국절 띄우기를 어떻게 봅니까.
“제헌헌법 정신은 일본의 잔재 청산, 독립운동 계승이었습니다. 당시 정부 수립을 한 사람들도 ‘모양’이 빠지면 안 되니까요. 그런 점에서 이승만이 살아 돌아온다면 건국절 추진세력을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이승만의 정통성 자체가 1948년 정부 수립이 아니라 1919년 임정 대통령에 있었으니까요. 이승만 평가는, 생전에 동양 최대 동상을 지었는데 본인이 생전에 그 동상이 파괴돼 길거리에 끈이 묶여 돌아다닌 사람이었다는 사실로 대신하겠습니다. 생전에 자기 동상 세우는 사람 중에 정상적 정치인이 있습니까.”
- 많은 한국인들이 한국전쟁 이후 미국을 고마운 존재로 여깁니다. 그 이전의 미국과 그 후의 미국은 다른 존재일까요.
“같은 미국이라고 봅니다. 기본적으로 선의를 가지고 있지만, 결정권은 자신들이 행사한다는 태도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표현 방식이 달라졌을지 모르지만, 지금도 본질적으론 비슷하다고 봅니다.”
- 김정은이 최근 남북한 동족관계를 부정했는데요.
“3대 세습이 정상적 국가는 아닙니다. 지금의 북한을 공산주의 국가라고 보기 어렵죠. 이런 기이한 시스템과 마주하게 된 데는 북한이 언젠가 붕괴할 거라 예상하고 정책을 편 것도 한 요인입니다.”
- <독도 1947>에서 한·미·일 관계 차원에서 독도 문제의 기원을 다뤘는데요. 윤석열 대통령이 한·미·일 동맹 수준의 합의에 도장을 찍은 걸 어떻게 봅니까.
“미국 그립이 워낙 세니까 결국 그렇게 갔는데요. 외교에는 상대도 있지만, 국민적 지지나 공감대도 중요합니다. 한국 외교의 큰 문제는 강한 권력 시절에 상대방과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데, 결국 1965년 한일협정 같은 걸 보면 국민적 동의나 지지를 못 받으면 나중에 문제가 되거든요. 결정 내린 사람들도 이게 과연 어떤 의미인지 자각 못하는 것 같아요. 배움이 짧으면 공부하거나 참모들 조언을 들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외교부는 배제돼 있는 것 같고요. 나중에 누군가 제대로 된 역사를 써야겠죠.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어떻게 이런 중대한 결정이 내려졌는지….”
- 해방 직후사가 남긴 중요한 현대 한국의 원형은 민주주의 왜곡인 듯합니다.
“민(民)의 삶이 그냥 공깃돌처럼 돼버린 것이라고 봅니다. 당시 살았던 한국인들은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처럼 무슨 일이 자기한테 벌어지는지도 모르고 결정된 판에 이끌리는 대로 우왕좌왕한 면이 있습니다.”
- ‘소련에 우호적인 통일국가가 됐으면 좋았을 것이란 말이냐’고 묻는다면요.
“유치원생, 초등학생 수준의 역사인식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사회에 대한 성찰이 없는 거죠. 때묻지 않은 순결한 역사가 어디 있겠어요. 그중 일부를 빼내 역사로 만들고 나머지는 역사 아닌 것으로 만들려 한다면 정말 우스꽝스러운 광대놀음이 될 것입니다. 현대 한국의 부정적 원형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힘은 포용성과 다층성을 그대로 인정하는 데서 나왔다고 봅니다. 그 길로 가지 않았다면 다른 가능성은 뭐가 있었겠느냐,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용기있게 직시하지 않으면 또 그런 일을 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