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소박한 자유인’ 홍세화

2024.04.22 17:59 입력 2024.04.22 20:43 수정

홍세화(1947~2024)를 세상에 알린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1995)에서 개똥 세 개 이야기를 처음 접했을 때 솔직히 그렇게 와닿지는 않았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금 그 의미를 알 것도 같다.

이야기는 그가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에게 들은 일화에서 비롯됐다. 서당 선생이 3형제에게 장래희망을 묻는다. 서당 선생은 ‘정승’이 되겠다는 맏이, ‘장군’이 되겠다는 둘째를 칭찬하며 막내를 쳐다본다. 막내는 장래희망을 말하는 대신 ‘저보다 글 읽기를 싫어하는 큰형에게 개똥 세 개 중 하나를, 저보다 겁이 많은 둘째 형에게 개똥 하나를 입에 넣어주고 싶다’고 한다. 마지막 개똥은? ‘당연히 서당 선생에게’라고 답한다. 할아버지는 ‘살아가며 세번째 개똥이 서당 선생 몫이란 말을 하지 못하게 될 때, 그때는 네가 그 세번째 똥을 먹어야 한다’고 했고, 어린 홍세화는 수긍했다.

군사독재 박해를 피해 프랑스에 망명했다가 23년 만에 고국땅을 밟았을 때 그는 55세였다. 요즘 기준으로 ‘서오남’이었지만 그가 발 디딘 곳은 전혀 달랐다. ‘다름을 차별과 억압의 근거로 삼아선 안 된다’는 다소 온건한 얘기를 하던 그의 목소리는 갈수록 급진화됐다. 많은 이들이 돈의 노예가 됐고 가지지 못한 이들의 비참함이 극에 달한 한국 현실을 겪으면서다. 그는 언론인으로 몸담으며 작년까지 글을 썼던 한겨레를 향해 ‘프티부르주아 신문’이란 쓴소리도 주저하지 않았다. 말에 그치지 않았다. 징역형보다 가벼운 벌금형을 선고받고도 가난하기 때문에 다시 교도소에 갇히는 사람들과 연대하고 그 부조리함을 고발하고자 장발장은행을 만들기도 했다.

홍세화는 부단한 저술·번역과 활동을 통해 불온한 사상을 퍼뜨리며 기성체제와 불화하고, 동시에 약자와 연대하는 삶을 살았다. 그가 ‘가장자리’를 자처하며 어려운 길만 걸었던 건, 자신이 난민과 이주노동자로서 살았던 경험을 잊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저승에서 “할아버지, 그래도 개똥을 적게 먹으려고 무척 애썼어요”라고 말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공부하며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려 했던 학습협동조합 이름처럼 ‘소박한 자유인’이었던 홍 선생님, 이제 편히 잠드시길.


홍세화 ‘가장자리’ 대표가 지난 2013년 6월5일 격월간지 <말과 활> 창간을 계기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정근 기자

홍세화 ‘가장자리’ 대표가 지난 2013년 6월5일 격월간지 <말과 활> 창간을 계기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정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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