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총리

역대 대통령, 총리 발탁 ‘비하인드 스토리’

2015.05.01 22:27 입력 2015.05.01 22:32 수정

박정희, 군부 이미지 보완하려 교육자 활용… 민주화 이후 ‘거물 정치인 관문’

대통령중심제 국가에서 대통령 휘하에 국무총리직을 두는 것은 이례적이다. 헌법이 만들어진 1948년부터 현재까지 국무총리를 역임한 이들은 총 39명, 평균 재직기간은 1.57년이다. 권력이 집중되는 대통령제를 보완할 목적으로 채용한 총리제가 실제로는 대통령의 이미지를 보완하는 상징적 역할에 머물렀다.

국회는 때때로 대통령을 견제하는 방식으로 총리 인준을 활용했다. 이승만 정부 초기 한민당이 이윤영 초대 총리 서리 후보자 인준을 부결시킨 것은 단적인 예다. 대통령과 국회는 총리 지명을 두고 기싸움을 벌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평안도 기독교 독립운동가 출신 이윤영을 초대 총리로 지명했지만 야당 성향의 인물이 총리가 되길 기대했던 제헌의회는 인준을 거부했다. 이윤영은 제1공화국 내내 총리(서리)에 4번 지명되었지만 야당이었던 한민당은 모두 부결시켰다.

제3공화국 이후 총리는 군부정권의 이미지를 보완하는 용도로 활용됐다. 박정희 정권은 제3공화국 초대 총리로 교육자 출신 최두선(재직 1963년 12월~1964년 5월)을 임명했다. 정권이 안정되자 군 출신 정일권(1964년 5월~1970년 12월), 경제관료 출신 백두진(1970년 12월~1971년 6월), 중앙정보부를 창설한 김종필(1971년 6월~1975년 12월) 등이 차례로 총리에 올랐다. 전두환 대통령도 1982년 말 유화조치를 취하면서 학자 출신이자 전북 부안 출신인 김상협씨를 임명했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을 유혈진압하면서 생겨난 정치적 부담을 덜어내려는 상징적 조처였다. 노태우 정부도 총리 5명 중 4명을 학자 출신으로 임명했다. 조정관 전남대 교수는 “총리임면권이 전적으로 대통령에게 있으니, 적절한 인물을 기용해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고 분위기 쇄신이 필요할 때는 총리 교체로 정국변화를 꾀할 수 있었다”며 “국민의 편의보다는 정권의 편의”라고 말했다.

민주화 이후 총리는 ‘거물 정치인’이 되는 관문으로 주목을 받았다. 김영삼 대통령은 임기 5년 동안 총리를 7명 지명했다. 정치인(황인성·이홍구), 학자(현승종·이영덕·이수성), 법조인(이회창), 관료(고건) 등 출신도 다양했다. 대법관 출신 이회창 전 총리는 대통령과의 의견마찰도 불사하는 소신행보로 15·16대 대선후보로까지 성장했다.

민주화 이후에도 대통령 권한의 비대화와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단이 논의되면서 총리에 대한 주목도는 더욱 커졌다. 하지만 후계자를 여럿 내세워 대통령 권력분산을 방지하는 데 이용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총리는 대통령의 정치적 동반자 수준까지 위상이 격상된다. DJP연합으로 집권한 김대중 정권 때 김종필·박태준·이한동 전 총리가 자민련 총재 신분으로 총리에 올랐다. 김종필 전 총리는 야당이 6개월 동안 인준을 거부해 ‘서리’에 머물렀고, 총리직을 맡은 이후에는 내각제 개헌 문제로 대통령과 마찰을 빚다 사임했다. 노무현 정권 시절 이해찬 총리는 ‘책임총리’로 대통령 대신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현안에 소신있는 목소리를 냈다. 이명박 정부는 정운찬 총리에게 국정 특정부문을 담당하게 하는 ‘전담 관료’로서 활용했다. 김황식 총리는 행정에만 집중하는 ‘대통령의 그림자’로 되돌아갔다. 박근혜 정부는 안대희 전 후보자·이완구 전 총리를 통해 총리에게 ‘공직기강’ 문제 해결을 맡기는 것을 시도했으나 좌초했다.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총리 지위는 대통령의 권한과 한계 외에도 다양한 정치적 이해관계의 산물”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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