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연의 색다른 인터뷰

경북도지사 선거 패배, 임미애

작업복 차림의 임미애씨가 경북 의성군 문흥2길 우사(牛舍)에서 소들에게 여물을 주고 있다. 1992년 결혼과 함께 농촌으로 들어가 풀뿌리 정치를 실천해온 그는 ‘보수의 심장’ 경북에서 진보정당 간판을 달고 의성군의원 두 번에 경북도의원을 4년간 지내는 파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6·1 지방선거에서는 지역주의 벽을 넘어서지 못했다. 한수빈 기자 subinhann@kyunghyang.com

작업복 차림의 임미애씨가 경북 의성군 문흥2길 우사(牛舍)에서 소들에게 여물을 주고 있다. 1992년 결혼과 함께 농촌으로 들어가 풀뿌리 정치를 실천해온 그는 ‘보수의 심장’ 경북에서 진보정당 간판을 달고 의성군의원 두 번에 경북도의원을 4년간 지내는 파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6·1 지방선거에서는 지역주의 벽을 넘어서지 못했다. 한수빈 기자 subinhann@kyunghyang.com

승자가 아니다. 박빙도 아니었다. 일찍이 예견됐던 패배. 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주목했다. ‘보수의 심장’ 경북에서 더불어민주당 간판을 달고 도지사 선거에 출마한 임미애씨(56) 이야기다. 터무니없는 도전만은 아니었다. 그는 의성군의원 두 번에 4년간 경북도의원을 지낸 전력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지역주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했다. 득표율 22.04%로, 77.95%를 얻은 이철우 국민의힘 후보에게 패했다.

그의 행보가 관심을 끈 이유는 또 있다. 그는 이른바 ‘86세대’다. 민주화운동이 절정이던 1987년 이화여대 총학생회장이었다. 하지만 상당수 86세대가 거대담론을 앞세우며 중앙 정치에 나선 것과 달리, 그는 농촌으로 내려가 ‘풀뿌리 정치’를 실천해왔다. 임씨는 1992년 같은 길을 걷던 남편을 따라 경북 의성 농촌으로 들어갔다. 마늘과 고추 농사를 짓고 사과·자두 등을 재배해 도회지에 내다 팔았다. 2004년부터는 소를 키웠다. 민주당이 경북도지사 후보로 임씨를 공천한다고 발표하자 ‘소는 누가 키우나?’라는 우스갯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온 배경이다.

지난 3일 경북 의성군 문흥2길로 내려가 임미애씨를 만났다. 그가 운영하는 대형 우사(牛舍)에서는 청결 상태가 좋아 보이는 암소 수십마리와 송아지들이 한가로이 거닐고 있었다. 작업복을 입고 장화를 신은 채 소를 돌보는 임씨에게서는 건강한 노동에서 뿜어나오는 활기찬 에너지가 감돌았다.

임미애씨는 경북도지사 선거 패배와 관련해 “목표 득표율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만족한다”고 말했다. 그는 더불어민주당 상황이 매우 좋지 않음에도 선거에 나선 이유에 대해 “경북 민주당이 지금까지 해온 많은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는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한수빈 기자

임미애씨는 경북도지사 선거 패배와 관련해 “목표 득표율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만족한다”고 말했다. 그는 더불어민주당 상황이 매우 좋지 않음에도 선거에 나선 이유에 대해 “경북 민주당이 지금까지 해온 많은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는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한수빈 기자

“경북 민주당 치유하고 힘 모으려 했지만
선거 기간 내내 ‘죄송합니다’만 연발
기초의원 4년 전보다 반토막 나 아쉬워”

- 예견된 낙선, 소회가 어떻습니까.

“목표했던 25% 득표율을 달성하지 못한 것은 서운하지만 저는 만족해요. 지금 더불어민주당이 죽 쑤는 것을 생각하면 선방했다고 생각하니까요.”

- 왜 25%를 목표 득표율로 잡았나요.

“지난 3월 대선에서 이재명 민주당 후보와 심상정 정의당 후보가 경북지역에서 받은 득표율을 합산한 수치예요. ‘그 정도 받으면 좋겠다, 하지만 쉽지는 않겠다’고 생각했어요.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를 찍은 지지자 상당수가 투표장에 나오지 않을 것으로 봤고, 중도층의 마음도 얻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 이유는요.

“지지자들은 대선 패배 후 큰 충격과 상처를 입었어요. 외부와 단절하며 지내는 분도 많아요. 또 하나는 민주당이 공천 등에서 보인 행태가 과연 국민들의 눈높이에 맞는가 하는 점이에요. 선거는 중도층의 외연 확장이 중요해요. 하지만 민주당은 대선 패배 후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어요. 대선에서 패배한 (이재명) 후보를 연고도 없는 인천 계양을 (국회의원) 보궐선거 후보로 나서게 했어요. (송영길) 당 대표는 대선 패배 책임을 진다며 사퇴한 후 서울시장 후보로 나섰고요.”

- 그런 상황에서도 출마를 결심한 진짜 속내는 뭐였습니까.

“경북 민주당이 지금까지 해온 많은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는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에요. 중앙에서 뭘 하든, 저는 경북의 민주당을 치유하고 다시 힘을 모으게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이번 지방선거에 출마한 경북 기초의원 후보들 중에는 훌륭한 분이 많아요. 이분들을 당선시키는 데 마중물이 되고 싶었어요. 4년 전 경북에서 기초의원 50명이 당선된 데 비해 이번엔 27명만 당선된 게 그래서 좀 아쉬워요.”

- 유세과정에서 이전 선거와 비교해 민심의 변화를 느낀 점이 있나요.

“민주당 지지자들로부터 많이 혼났어요. 경주 오일장에서 만난 분도 ‘이전 지방선거와 총선 모두 표를 몰아줬는데 민주당이 한 게 뭐냐’며 굉장히 화를 내셨어요. 저는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만 연발했어요. 어느 순간 눈물이 확 솟구치더라고요. 그분이 마지막에 하신 말씀이 잊히지 않아요. ‘나는 평생 민주당을 찍었고, 이번에도 민주당을 찍을 거다. 하지만 민주당도 양심 좀 있었으면 좋겠다.’”

1987년 6·10 총궐기대회  때 전투경찰들이 학교 정문을 막아선 가운데 임미애 당시 이화여대 총학생회장이 담 위에 서서 주먹을 쥔 채 구호를 외치고 있다. 임미애씨 제공

1987년 6·10 총궐기대회 때 전투경찰들이 학교 정문을 막아선 가운데 임미애 당시 이화여대 총학생회장이 담 위에 서서 주먹을 쥔 채 구호를 외치고 있다. 임미애씨 제공

이대 총학생회장으로 6월항쟁 이끌어
같은 길 걷던 남편 따라 의성 내려가

임씨는 경북 영주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서울에서 성장했다. 한양여고 졸업 후 1984년 이화여대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1987년 6월항쟁 때 이화여대 총학생회장으로 전대협 1기를 이끈 주요 멤버다. 1992년 같은 길을 걷던 김현권(58·경기환경에너지진흥원 원장)과 결혼하면서 서울에서 수백㎞ 떨어진 경북 의성 농촌으로 들어갔다. 시골 아낙이 돼 농사를 지었다. 소 키우는 일은 그런 일 끝에 시작했다.

- 원래 청소년기 꿈은 뭐였습니까.

“형사가 되고 싶었어요. 추리소설을 좋아했거든요. 경찰대에 진학하겠다니까 엄마가 시집 못 간다며 말렸어요. 부모님 뜻에 따라 여대에 간 거예요.”

- 남편과는 어떻게 만났나요.

“남편은 반제동맹당 사건으로 1985년 구속됐다가 1988년 8·15 특사로 나왔어요. 직후 같이 석방된 이재오, 김문수, 장기표씨 등과 함께 서울 종로에서 양심수 전원 석방을 촉구하는 농성을 벌였어요. 저도 참여했어요. 당시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의 간사로 일하던 때였어요. 남편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그런데 농성 후 뒤풀이 자리에서 그가 대뜸 저한테 ‘결혼할래요?’ 하더라고요.”

- 뜬금없이요?

“예. 나중에 남편이 하는 말은, 제가 걸레를 빨아서 다 같이 농성하던 방을 닦는 모습이 신선한 충격이었대요.”

- 뭐라고 답했나요.

“속으로 ‘이런 미친 사람이 다 있나’ 생각하고 말았죠(웃음). 이후 남편은 복학(서울대 천문학과)하기 전까지 민가협 일을 도왔어요. 국내 교도소에 수용돼 있는 양심수의 이름·사건·형량을 최초로 파악하고 정리해 한겨레신문을 통해 공개했어요. 그걸 토대로 국제앰네스티도 한국의 양심수 관련 보고서를 펴냈고요. 남편과 사귄 것은 1990년 시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부터예요. 여러 사람과 의성으로 조문을 다녀온 후 남편이 자주 연락했어요.”

반제동맹당 사건은 1986년 말 경기도 경찰국이 대학 출신 근로자 16명을 강제연행해 이적단체인 반제동맹당을 결성하려 했다고 조작한 후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한 사건이다. 김현권, 박충렬, 이민영, 김원재 등은 고문기술자로 악명 높은 이근안 등으로부터 모진 가혹행위를 당했다. 김현권만 유일하게 이근안의 얼굴을 기억했다. 임미애씨는 “고문 후유증으로 결혼 후에도 남편은 자주 아팠다”고 말했다.

1988년 임미애씨 (맨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는 민가협 간사로 활동했다.

1988년 임미애씨 (맨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는 민가협 간사로 활동했다.

친정엄마는 딸 고생시킨다며 사위 구박
‘밥할래? 일할래?’ 시어머니 물음에 ‘일할래요’
서울서 손님 오면 경찰 찾아와 주민번호 요구

- 살면서 궂은 노동을 안 해본 서울 여성이 시골 농부가 되겠다고 결심하는 게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아요.

“당시 학생운동을 했던 많은 사람이 공장이나 농촌으로 들어갔어요. 저도 그런 생각을 품고 있던 차에, 사귀는 사람이 1991년에 먼저 의성에 내려와 농사를 짓고 있어 따라 들어온 거예요.”

- 친정 부모님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엄마가 결혼을 심하게 반대하셨어요. 그래도 제가 고집을 부리니까 직접 확인해보시겠다며 저를 앞세워 의성에 내려오셨어요. 그때 시어머니가 엄마한테 ‘노처녀 받아주는 것도 감지덕지하라’는 식으로 말씀하시는 바람에 엄마가 더 화가 나셨죠(웃음). 엄마는 남편을 구박했어요. 눈앞에서 밥그릇을 내던진 적도 있어요. 훗날 엄마가 남편에게 사과했죠. 지금은 친정 부모님도 의성에 내려와 사세요.”

- 왜요.

“아버지가 은퇴한 후 두 분만 지내는 게 적적하실 거라며 남편이 제안했어요. 소일거리로 하시라고 텃밭을 떼어드렸고요.”

남편은 집안의 장손이어서 제사만 1년에 11번이었다. 부부는 결혼 이듬해인 1993년과 1994년 연년생으로 두 아들을 낳았다.

- 농사일과 시집살이, 육아 모두 처음 하는 일인데 많이 고됐겠어요.

“9시 뉴스 볼 새도 없이 누우면 바로 곯아떨어질 만큼 농사일이 고되긴 했어요. 그래도 날이 밝으면 저절로 눈이 떠지더라고요. 어머님은 사투리를 잘 못 알아들어 답답하셨을 텐데도 저를 예뻐해주셨어요. 당시 저희가 경작한 과수원이 4000평, 밭이 2800평이에요. 모종 심을 때나 수확기에는 십수명씩 일꾼을 사야 하죠. 주문배달이 불가능한 그때만 해도 직접 오참과 점심 등 세 번을 기본으로 차려내고 때로는 저녁밥까지 지어 내야 했어요.”

- 임미애씨가 직접 차려냈다고요.

“아뇨. 제가 음식을 해봤어야죠. 안 되겠는지 어느 날 어머님이 물으셨어요. ‘니 밥할래? 일할래?’ 냉큼 ‘제가 일할 테니 어머님이 밥하세요!’라고 했죠(웃음). 이후 어머님이 집안살림을, 제가 농사일을 맡았어요.”

- 어머님이 육아도 해주셨나요.

“아뇨. 아이가 똥 싸면 ‘아유, 똥 샀다’ 하면서 나가셨어요(웃음). 아이들에게는 많이 미안하죠. 우리 부부가 일할 때 밭 한가운데 땡볕에서 자기들끼리 놀다 지치면 그대로 쓰러져 잠들곤 했어요.”

경찰은 부부의 집을 자주 들락거렸다. 서울에서 지인이 방문하면 주민번호를 요구했다. 학생운동 전력으로 인해 부부는 오래전부터 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었다. 농민회(전국농민조합총연맹)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임미애씨는 마늘과 고추농사를 짓고 사과와 자두 등을 재배해 도회지에 내다 팔았다. 2004년부터는 소를 키웠다. 임미애씨가 송아지와 눈을 맞추고 있다. 한수빈 기자

임미애씨는 마늘과 고추농사를 짓고 사과와 자두 등을 재배해 도회지에 내다 팔았다. 2004년부터는 소를 키웠다. 임미애씨가 송아지와 눈을 맞추고 있다. 한수빈 기자

학교 어머니회장 맡고 복지관 봉사
학부모와 할머니들 덕에 군의원 당선
군·도의원 등 거치며 풀뿌리 정치 실천

큰아이의 초등학교 입학 후 부부는 의성읍으로 이사하고 농장으로 출퇴근했다. 읍내 아이들끼리만 어울리자 큰아이가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임씨는 같은 반 엄마들에게 제안해 공동육아를 했다. 그는 2년 연속 어머니회장에 당선됐다.

- 어쩌다 어머니회장을 맡게 됐습니까.

“아이가 급식밥이 너무 맛이 없다는 거예요. 알고보니 의성 지역에서 생산되는 좋은 농산물들이 아이들 급식 재료로는 전혀 안 들어가고 있었어요. 정부미로 밥을 쪄서 내고, 장류는 수입이었어요. 어느 날 교장선생님이 학부모들에게 자유롭게 의견을 이야기하라고 하셨어요. 제가 손을 번쩍 들고 이 문제를 거론했죠. 그때 어느 어머니가 저를 유심히 봤던 모양이에요. 이듬해 저를 추천해 당선됐어요.”

- 급식 문제는 해결됐나요.

“아뇨. 단가 차이가 컸어요. 그래서 2006년 지방선거에서 군의원(열린우리당)에 출마한 거예요. 마침 한 선거구에서 2~4명을 뽑는 기초의원 중대선거구제가 처음 실시되니, 적어도 3등은 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당선 후 의회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한 일이 교육청을 통해 학교에 끼니당 얼마씩 급식비를 지원하도록 하는 조례를 만든 거예요. 덕분에 아이들에게 우리 고추장·된장을 먹이고 인스턴트 식품은 줄일 수 있게 됐어요.”

- 2006년 지방선거는 열린우리당의 참패로 끝났어요. 그런 가운데 더구나 민주당 지지기반이 취약한 의성에서 어떻게 당선된 겁니까.

“어머니회 활동을 같이했던 학부모들이 많이 도와주셨어요. 제가 봉사활동을 한 복지관 할머니들도 응원해주셨고요. 저는 교사들을 지원하는 조직으로만 기능하던 어머니회의 성격을 바꾸고자 했어요. 잘못된 관행은 없애고, 바자회를 크게 열어 그 수익금을 운동부 학생들의 간식비로 사용했어요. 의성은 씨름이 유명한데 경제적으로 어려운 학생선수들이 많았거든요. 그렇게 회장을 2년간 하자 문화가 바뀌었어요.”

- 복지관에서는 어떤 봉사를 했나요.

“할머니들께 실생활에서 써먹을 수 있는 영어를 가르쳐드리고자 했어요. 길거리 간판을 가리키며 a가 어떤 발음이 나는지, ch는 어떻게 발음하는지를 알려드렸죠. 이후 할머니들은 치킨, 호프 등 눈에 보이는 영어간판을 읽으며 신나 하셨어요. 제가 군의원이 돼 처음 해외연수를 갈 때는 3만원을 모아 주셨어요. 비행기에서 음료수 사 먹으라고요. 음료수 공짜라고 말씀드려도 제 손에 꼭 쥐여주셨어요.”

4년 후인 2010년 지방선거에서 1등으로 재선(제6대)에 성공했다. 2014년에도 선거를 준비했지만 세월호 참사가 발생하면서 포기했다. 그는 “도저히 유권자들 앞에서 웃을 자신이 없었다”고 했다. 2018년 도의원으로 당선됐다. 이듬해 경북공무원노조 선정 ‘베스트 도의원상’을 받았다. 2015년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당대표 시절 혁신위원회 대변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임미애씨는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선거는 제 선거가 아니라, 지역 정서상 떨어질 게 뻔히 보이는 남편의 선거를 지켜보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제 선거를 하면서 운 적은 없지만 남편의 선거를 하면서는 많이 서럽고 많이 울었다”고 했다. 평생 같은 길을 걸어온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그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한수빈 기자

임미애씨는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선거는 제 선거가 아니라, 지역 정서상 떨어질 게 뻔히 보이는 남편의 선거를 지켜보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제 선거를 하면서 운 적은 없지만 남편의 선거를 하면서는 많이 서럽고 많이 울었다”고 했다. 평생 같은 길을 걸어온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그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한수빈 기자

소 키우는 농부의 일상으로 다시 복귀
4년 후 재도전? 지역 한계 느껴 물음표

- 소는 언제부터 키웠습니까.

“2004년 열린우리당 공천을 받아 경북 지역구 국회의원에 도전했다가 낙선한 남편이 처음 3마리를 사왔어요. 그때는 비육소였는데, 150마리까지 늘었죠. 제가 도맡은 것은 2016년부터예요. 남편이 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이 되면서 대학생 아들 둘과 함께 서울에서 분가해 살았거든요. 저 혼자 감당해야 하니 50여마리만 남기고 팔았는데 판매대금이 안 들어와요. 알고보니 남편이 축협에서 사료대금으로 당겨 쓴 빚이 많았어요. 2017년 제가 빚을 싹 갚았어요.”

- 현재는 몇 마리나 있나요.

“제가 맡고부터 새끼 낳는 소를 사육하는 한우 번식 농가로 바꿨어요. 새끼를 낳으면 8개월 정도 키워 경매장에 내놓죠. 현재 송아지까지 합해 70여마리가 있어요. 1년에 약 35마리의 새끼를 받아요.”

- 의정활동을 하면서도 소를 직접 키웠나요.

“그럼요. 보통 매일 아침 5시 반에 일어나 사료를 주고, 사람들을 만난 다음, 회의가 있으면 오전 10시에 의회에 가요. 오후 4시면 다시 돌아와 우사 청소 등 여러 가지 일을 하죠. 2018년 도의원이 되고부터는 사료 주는 일을 도와줄 분도 고용했어요.”

- 여성 혼자 소를 키우고 송아지를 받아내는 게 만만치 않은 일일 텐데요.

“새끼가 앞발이 아닌 뒷발부터 나오면 생명이 위험해요. 발에 줄을 묶고 서너 사람이 붙어 빨리 빼내야 해요. 제일 힘든 일은 갓 태어난 새끼들이 자주 감염되고 설사를 많이 하는 로타바이러스예요. 새끼를 살리려고 제가 안 해본 짓이 없어요. 12시간 동안 링거로 약을 투여받는 송아지 옆에서 밤을 꼬박 새운 날도 많아요. 새끼가 죽으면 제일 안타까운 것은 어미소예요. 젖이 불어도 새끼가 안 오면 애타게 울면서 굉장히 불안해해요.”

- 남편은 2004년, 2012년 총선에서 낙선하고 2016년 비례대표로 국회 입성에 처음 성공했어요. 2020년 총선 때 경북에서 재선에 도전했지만 35.69%의 득표율로 떨어졌고요. 부인의 선거전적이 더 좋네요.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선거는 제 선거가 아니라, 지역 정서상 떨어질 게 뻔히 보이는 남편의 선거를 지켜보는 일이에요. 제 선거를 하면서 운 적은 없어요. 그런데 남편 선거를 하면서는 많이 서럽고 많이 울었어요. ‘이 사람의 진심이 사람들 마음에 온전하게 와닿게 해달라’고 기도도 열심히 했고요. 하지만 안 되잖아요.”

돌연 그의 눈에 물기가 차올랐다. 그런 그에게 2년 후 총선이나 4년 후 지방선거에 도전할 거냐고 물었다. 임씨는 “선거가 끝나면 그다음 선거는 생각하지 않는다”며 “다만 제가 의성군에서 선거를 통해 이룰 수 있는 최고는 어쩌면 도의원일지 모른다고 생각할 때도 있다”고 말했다. 국민의힘의 막강한 경북지역 조직과 지역 정서를 극복할 수 있을지 한계를 느끼기 때문이라고 했다. 과연 ‘소 키우는 농부’ 임미애씨는 이를 뛰어넘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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