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당신이 본 스마트폰은 여기 그대로 있지만 당신이 보려던 전자는 이미 그 자리에 없다

2017.09.07 21:53 입력 2017.09.07 22:01 수정
김상욱 | 부산대 물리교육과 교수

보는 것은 믿는 것인가

세상만물을 이루고 있는 원자를 설명하는 이론이 양자역학이다. 원자는 원자핵 주위에 전자가 돌고 있는 구조이니 양자역학은 전자가 어떻게 운동하는지를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볼 수 없는 전자의 운동성을 해명하기 위해 물리학자들은 고군분투했고, 마침내 하이젠베르크의 행렬역학과 슈뢰딩거의 파동역학으로 답을 했다. 화가가 보지 않은 것을 그려내듯, 물리학자들은 보았다고 믿는 것을 그려낸 것이다. 어쩌면 우리들은 보는 것을 믿는 게 아니라 믿는 것을 보는 것이다.

세상만물을 이루고 있는 원자를 설명하는 이론이 양자역학이다. 원자는 원자핵 주위에 전자가 돌고 있는 구조이니 양자역학은 전자가 어떻게 운동하는지를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볼 수 없는 전자의 운동성을 해명하기 위해 물리학자들은 고군분투했고, 마침내 하이젠베르크의 행렬역학과 슈뢰딩거의 파동역학으로 답을 했다. 화가가 보지 않은 것을 그려내듯, 물리학자들은 보았다고 믿는 것을 그려낸 것이다. 어쩌면 우리들은 보는 것을 믿는 게 아니라 믿는 것을 보는 것이다.

‘보는 것은 믿는 것이다’라는 서양 속담이 있다. 보는 것이 왜 믿는 것일까? 보는 것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감각이기 때문이다.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눈앞의 스마트폰이 보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우선 빛이 스마트폰에 맞아 튕겨 나온다. 튕겨 나온 빛은 사방으로 흩어지는데, 그 일부가 우리 눈에 도달한다. 수정체를 통과하며 굴절된 빛은 망막에 스마트폰의 상을 맺는다. 망막에 있는 세포는 빛을 감지해 전기신호를 발생시키고 이것이 뇌로 이동하면 우리는 보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본 것’은 본 ‘것’과 같은 것일까? 우리 뇌에 떠오른 심상은 물체와 같은 모습일까? “뭐 이런 질문이 다 있냐”고 할 독자도 있으리라. 오늘의 주제는 바로 본다는 것과 관련 있다.

■ 본다는 것

과학의 역사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의심하는 데에서 시작했다. 지구는 정말 편평한가? 태양이 정말 돌고 있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시간이나 길이가 무엇인지 묻는 것에서 출발한다. 물론 시간이 무엇인지는 아인슈타인도 모른다. 그래서 시간을 잰다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한다. 공을 하늘로 던지며 시곗바늘을 읽고, 공이 돌아와 손에 잡힐 때 시곗바늘을 다시 읽는다. 두 시곗바늘 눈금의 차이가 공의 비행시간이다. 이렇게 차근차근 따라가면 운동하는 사람의 시간은 정지한 사람보다 느리게 간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양자역학은 원자를 그 대상으로 한다. 원자는 정말 작다. 앞 문장의 마침표 위에도 100만개의 원자를 늘어세울 수 있을 정도다. 원자를 맨눈으로 볼 수 있을까? 원자는커녕 원자보다 훨씬 큰 바이러스도 보지 못한다. 원자는 원자핵 주위에 전자가 돌고 있는 구조를 갖는다. 직접 본 것은 아니고 간접적으로 알아낸 것이다. 그렇다면 전자는 원자 내부에서 어떻게 운동하고 있을까? 양자역학이 원자를 설명하는 이론이라면 바로 이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1925년까지 물리학자들은 말 그대로 악전고투한다. 당시까지 알려진 물리이론을 총동원해 전자의 운동을 설명해보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당시로서 그나마 가장 성공적인 닐스 보어(1922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의 이론조차 다수 물리학자의 외면을 받는 상황이었다. 사실 외면할 만했다. 전자가 유령처럼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순간이동할 수 있다는 내용을 포함했으니 말이다. 보어는 급기야 에너지보존법칙을 버려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까지 한다. 버릴 게 따로 있지. 이제 물리학자들 모두 미치기 직전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이때 25세의 베르너 하이젠베르크(1932년 노벨물리학상 수상)가 혜성같이 나타난다. 하이젠베르크는 역사를 바꿀 질문을 던진다. 전자를 직접 볼 수 있을까? 직접 본다면 전자가 정말 공처럼 공간을 가로질러 연속적으로 날아가는 것으로 보일까? 과학의 역사를 보라. 당연한 것은 당연하지 않다. 본 적도 없는, 아니 영원히 볼 수도 없을 전자가 왜 상식대로 행동할 거라 생각할까?

이제 하이젠베르크는 엄청난 도약을 한다. 전자가 공처럼 행동한다는 기본 관념을 내던지고, 오로지 직접 알 수 있는 물리량들만 갖고 이론을 만들어 보자는 거다. 이게 무슨 말일까? 원자에서 측정할 수 있는 것, 즉 볼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스마트폰 보는 문제로 돌아가 보자. 스마트폰을 본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렇다. 스마트폰에 맞고 튕겨 나온 빛을 보는 것이다. 원자를 본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원자에 맞고 튕겨 나온 빛을 보는 것이다.

당시 원자를 설명하는 보어의 이론에 따르면 원자 내에는 불연속적인 ‘상태’들이 존재했다. 지구 주위를 도는 인공위성들의 ‘궤도’를 상태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인공위성의 궤도반지름을 바꾸고 싶으면 엔진을 작동시켜 더 높은 위치나 낮은 위치로 이동하면 된다. 이때 연료만 충분하다면 원하는 아무 궤도반지름이나 갈 수 있다. 하지만 원자 내의 전자는 특별한 반지름을 갖는 궤도에만 존재할 수 있다(이유는 모른다). 한 궤도에서 다른 궤도로 이동할 때는 그냥 점프를 해야 한다. 문제는 점프를 하는 동안 궤도 사이를 연속적으로 이동할 수 없다. 그냥 한 궤도에서 사라져서 다른 궤도에 ‘짠’하고 나타나야 한다(역시 이유는 모른다). 당시 물리학자들이 보어의 이론을 싫어한 것도 당연하다.

아무튼 전자가 이렇게 점프를 할 때 빛을 흡수하거나 방출한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원자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점프할 때 드나드는 빛뿐이다. 빛이 나오기 위해서는 점프를 ‘시작하는 상태’와 ‘끝나는 상태’가 반드시 정해져야 한다. 고속도로 통행료를 내려면 입구와 출구를 알아야 하는 것과 같다. 물리에서는 입구와 출구 모두 에너지로 기술된다. 즉 시작 에너지와 끝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가로 방향을 시작 에너지, 세로 방향을 끝 에너지 순서로 이들을 늘어세우면 2차원 격자 모양의 배열이 얻어지는데 이런 숫자들의 배열을 수학에서는 ‘행렬’이라 부른다. 이제 하이젠베르크는 선언한다. “원자는 행렬이다.”

만약 여기서 당신이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다면, 당신은 물리학자거나 정신병자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피타고라스는 “만물은 수”라고 했다는데, 하이젠베르크는 “만물은 수의 배열”이라고 하는 셈이다. ‘하타고라스’라 불러야 할라나.

아무튼 하이젠베르크의 행렬역학을 보고 기뻐한 물리학자는 당시 거의 없었을 것 같다. 그러거나 말거나 행렬역학은 원자의 모든 것을 제대로 설명하기 시작한다. 축복은 많지 않았지만 드디어 양자역학이 탄생한 것이다.

하이젠베르크의 행렬역학에서 김이 채 가시기도 전에 에르빈 슈뢰딩거(1933년 노벨물리학상 수상)는 파동역학을 내놓았다. 지난 호에서 다뤘던 전자의 이중성, 그러니까 전자가 입자이자 파동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둔 양자이론이다. 파동역학은 전자의 파동을 기술하는 방정식을 담고 있다. 이 방정식을 ‘슈뢰딩거 방정식’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생겼다.

[전문가의 세계 - 김상욱의 물리공부] (12) 당신이 본 스마트폰은 여기 그대로 있지만 당신이 보려던 전자는 이미 그 자리에 없다

“어차피 이해도 못할 수식을 왜 보여주느냐”며 역정을 내실 ‘수포자’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주위를 둘러보시라. 수많은 자연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자동차가 움직이고, 심장이 뛰고, 스마트폰이 울리고, 밥을 먹으면 힘이 나는 등. 이런 모든 자연현상의 99%를 설명하는 방정식이다. 세상 만물은 원자로 되어 있고, 이 방정식은 원자를 설명하니까.

행렬역학과 파동역학. 자세히 알지 못하더라도 이 둘이 전혀 다르게 생겼다는 것쯤은 금방 알 수 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방법은 동일한 예측을 내놓았다. 놀라운 일이지만 수학적으로 두 이론이 동일한 구조를 가지기 때문이다. 실제 오늘날 물리학자들은 두 가지 방법 모두 자유자재로 사용한다.

■ 보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니다

이것으로 해피엔딩일까. 그렇지 않다. 이제 이해하는 일이 남았다. 우리가 앞에서 얻은 결과의 물리적 의미는 무엇일까? 행렬역학은 불연속적인 점프를 내포하고 있다. 전자는 어떻게 두 상태 사이를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을까? 파동역학은 전자가 파동이라고 말해준다. 하지만 전자는 질량을 가진 입자다. 전자의 파동방정식은 전자가 입자라는 명백한 사실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더구나 파동은 여러 장소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소리를 생각해보라. 하지만 입자는 한 순간 한 장소에만 존재할 수 있다. 전자가 파동이라면 동시에 여기저기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이다. 전자는 유령인가?

양자역학의 모든 미스터리를 푸는 열쇠는 바로 ‘본다는 것’에 있다. 측정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생각해봐야 한다는 말이다. 빛이 스마트폰에 맞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까? 보어의 상보성에 따르면 빛은 파동이면서 입자다. 빛이 당구공 같은 입자라면 맞을 때 아파야 한다. 스마트폰에 빛이 맞고 튕겨 나올 때 스마트폰이 그 충격으로 움직여야 한다. 이건 말도 안된다. 동의한다. 스마트폰은 크니까. 하지만 전자와 같이 무지무지 작은 녀석은 어떨까? 실제 전자는 빛과의 충돌로 휘청거린다. 원래 위치에서 벗어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전자에 맞아 튕겨 나온 빛을 보고 알아낸 위치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전자는 이미 그 장소에 없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우리가 느끼고 알 수 있는 현상의 세계 바깥에 모든 사물의 근원이자 본질인 이데아가 있다고 주장했다. 전자에 빛이 닿을 때마다 움직인다면 우리는 전자의 현재 위치를 결코 알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전자는 어느 위치엔가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바로 이 생각이 이데아 같은 것을 가정하는 거다. 결코 알 수 없지만 존재한다고 믿는 전자의 위치 말이다. 결코 알 수 없는데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자체로 모순 아닌가? 하이젠베르크는 자전적 에세이 <부분과 전체>에서 어린 시절 플라톤 철학에 심취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플라톤과 결별한다.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아야 한다. 즉 측정이 대상에 변화를 일으킨다면 전자의 정확한 위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측정의 부정확성이나 오차가 아니라 본질적인 문제다. 누구도 전자에 교란을 주지 않고 위치를 알아낼 수 없다. 보이지 않는 이데아를 이야기하는 것은 물리가 아니다.

결국 원자의 세상에서 우리는 대상에 대해 모든 것을 완벽히 알아낼 수 없다. 현재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면 나중의 정확한 위치를 예측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일종의 불가지론이다. 그렇다면 양자역학은 무엇을 예측하는가?

전자는 파동이자 입자라는 이중성을 갖는다. 파동이기에 소리처럼 여기저기에 있을 수 있고, 입자이기에 한 장소에 모습을 드러낸다. 전자는 측정 때마다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 같지만 결과를 모으면 슈뢰딩거 방정식이 예측하는 확률분포와 완벽히 일치한다.

전자는 파동이자 입자라는 이중성을 갖는다. 파동이기에 소리처럼 여기저기에 있을 수 있고, 입자이기에 한 장소에 모습을 드러낸다. 전자는 측정 때마다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 같지만 결과를 모으면 슈뢰딩거 방정식이 예측하는 확률분포와 완벽히 일치한다.

전자는 파동이기도 하다. 소리처럼 여기저기 있을 수 있다. 당신이 하는 말을 옆 건물에서 들을 수는 없다. 여기저기 있다고 제멋대로인 것은 아니란 말이다. 소리는 파동방정식을 따라 공간에 퍼져나간다. 전자의 파동도 슈뢰딩거 방정식에 따라 공간에 퍼져간다. 전자가 어디 있는지 측정을 하면 전자는 입자이기도 하므로(이중성) 분명 한 장소에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전자가 측정 이후에도 그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니다. 측정이 전자를 교란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전자가 입자로 되는 동안 전자의 파동은 어디 갔을까? 전자의 위치를 측정할 때마다 전자는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결국 전자의 파동은 전자가 여기저기서 발견될 확률을 의미한다.

전자가 특정 위치에서 발견될 확률은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 일상 용어로서의 확률은 불확실하다는 느낌을 강조하지만, 양자역학의 확률은 수학적으로 완벽하게 결정되는 실체와 비슷하다. 측정할 때마다 전자는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 같지만 결과를 모아보면 슈뢰딩거 방정식이 예측하는 확률분포와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뜻이다. 주사위 던지기를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쉽다. 매번 무작위로 숫자가 나오지만 모아보면 각 면이 나올 확률은 정확히 6분의 1이다. 이런 의미에서 양자역학은 완전히 모른다는 의미의 불가지론이 아니다.

이쯤에서 정신이 혼미해지지 않으면 양자역학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고 보어는 말했다. 리처드 파인먼(1965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은 “이 세상에 양자역학을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고 단언했다. 그러니 너무 좌절하지 마시라. 아무튼 이로써 양자역학의 핵심 개념은 모두 이야기했다.

오르한 파묵(2006년 노벨문학상 수상)의 소설 <내 이름은 빨강>에 나오는 구절이다. “안다는 것은 본 것을 기억하는 것이며, 본다는 것은 기억하지도 않고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어둠을 기억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보지 않은 것도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양자역학적으로 보자면 우리는 본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았다고 믿는 것을 그린다. 결국 보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믿는 것을 보는 것이다.

▶필자 김상욱

[전문가의 세계 - 김상욱의 물리공부] (12) 당신이 본 스마트폰은 여기 그대로 있지만 당신이 보려던 전자는 이미 그 자리에 없다


고등학생 때 양자물리학자가 되기로 결심한 뒤 카이스트 물리학과에서 학사·석사·박사 학위를 받았다. 포스텍, 카이스트, 서울대 BK조교수를 거쳐 2004년부터 부산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철학하는 과학자로 과학의 대중화, 대중의 과학화를 위해 힘쓰고 있다. <영화는 좋은데 과학은 싫다고?> <과학수다1, 2>(공저) <과학하고 앉아있네 3, 4>(공저), <김상욱의 과학공부>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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