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영실, 자연과 설화가 얽힌 ‘신의 정원’…심심찮게 노루도 만날 수 있다

2018.11.29 20:41 입력 2018.11.29 20:48 수정

한라산이 제주도, 제주도가 한라산

영실기암 너머 1600고지 일대에 펼쳐진 한라산에서 가장 넓은 벌판인 선작지왓. ‘작지’는 자갈을, ‘왓’은 밭을 뜻한다. 작은 돌들이 마치 사람처럼 서 있는 넓은 들판인 셈이다. 쌓인 눈이 녹아내리는 봄이면 이곳은 진달래와 철쭉 등으로 산상화원을 이룬다. 사진 제공 윤종운

영실기암 너머 1600고지 일대에 펼쳐진 한라산에서 가장 넓은 벌판인 선작지왓. ‘작지’는 자갈을, ‘왓’은 밭을 뜻한다. 작은 돌들이 마치 사람처럼 서 있는 넓은 들판인 셈이다. 쌓인 눈이 녹아내리는 봄이면 이곳은 진달래와 철쭉 등으로 산상화원을 이룬다. 사진 제공 윤종운

백록담으로 갈 수는 없지만
수려한 경치로 인기 좋은 곳
제주인은 영실을 최고로 친다

이른 아침부터 영실매표소가 사람들로 붐볐다. 영실코스는 다른 코스보다 거리가 짧아 탐방객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한라산 정상까지는 가지 못하지만 수려한 경치와 기암절벽이 아쉬움을 덜어준다. 무엇보다 고도별 식물 분포를 엿볼 수 있어 개인적으로 즐겨 찾는 코스다. 이번 답사는 제주교대 교수인 영국인 데런 사우스콧과 동행했다. 그는 세계자연유산 서포터스로 활동하며 제주의 가치를 해외에 알리고 있다. 우연히 영어를 가르치러 왔다가 제주의 독특한 매력에 빠져 제주에 정착했다. 영실기암으로 올라가며 제주의 매력에 대해 짧은 대화를 나눴다. 그가 생각하는 제주의 매력은 ‘언어, 종교, 문화, 자연’이라고 말했다. 영어와 한국어를 번갈아 쓰며 자신의 생각을 쏟아냈다. 제주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사랑에 한국사람인 내가 부끄러울 정도였다.

영실기암과 오백나한

제주의 상징 한라산은 정상부에 백록담 분화구와 영실기암의 가파른 암벽, 병풍바위, 오백나한, 40여개의 오름 등 다양한 화산 지형을 가지고 있다. 한라산은 여러 번의 화산 활동으로 만들어졌다. 윗세오름 주변의 여러 오름에서 분출한 현무암질 용암이 흘러 선작지왓 등 완만하고 넓은 대지를 만들었다. 점성이 높은 조면암질 마그마가 분출하여 종모양의 용암돔을 만들었다. 이후 용암돔의 동쪽에서 점성이 낮은 현무암질 마그마가 다량으로 분출하여 성판악 쪽으로 넓게 흘러내려 평평한 지형을 만들었고, 백록담은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백록담은 서쪽은 조면암, 동쪽은 현무암으로 이루어져 있어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다른 경치를 나타낸다. 용암돔이 발달한 백록담의 서쪽과 남쪽 외벽은 오랜 시간 침식과 풍화작용으로 수려한 경관을 자랑한다. 내가 만난 제주사람들은 한라산의 절경을 굳이 꼽으라면 영실이라고 대답했다.

‘신령의 방’이란 의미의 영실은 이름에서부터 신비로움이 느껴진다. 옛 선인들이 한라산이 지닌 절경 가운데 으뜸으로 꼽을 만큼 빼어난 경치를 자랑한다. 영실휴게소를 지나 20여분 오르다 보면 정상부터 수백여m 내지른 골짜기까지 오백장군 또는 오백나한이라 부르는 수백의 돌기둥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제주특별자치도에서 발간한 <세계인의 보물섬 제주 이야기>를 보면 영실을 다녀간 옛사람들의 감상을 흥미롭게 다뤘다. “층을 이룬 바위들이 옥과 같은 병풍을 만들고, 그 사이로 세 갈래의 폭포가 쏟아져 섬 중에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가 가장 좋은 곳”이라고 기술했고, “기암괴석이 나열되어 있는데, 장군이 칼을 찬 것, 미녀가 쪽을 진 것, 중이 절을 하는 것, 신선이 춤을 추는 것, 호랑이가 걸터앉은 것, 봉황이 날아오르는 것 등 갖가지 모양으로 되어 있다. 한라산이 선삭이므로 산기슭도 장엄하지만 유독 이 한쪽면의 영봉은 옥을 배열한 듯 마치 풍악의 모양을 닮았고 또한 성벽과도 같아 이채롭다”고 묘사했다.

웅장한 자태의 영실기암은 애달픈 설화가 전해진다. 한 어미가 500명의 아들을 낳고 살았다. 흉년이 든 어느 해 아들들은 양식을 구하기 위해 사냥을 나갔고, 어미는 아들들 먹일 죽을 쑤고 있었다. 500명이 먹을 죽이니 그 솥이 오죽 컸을까. 어미는 펄펄 끓는 죽을 젓다가 솥에 빠져 죽고 말았다. 그것을 알 리 없는 아들들은 사냥에서 돌아와 배고픔에 어미 찾을 생각을 잠시 잊고 맛있게 죽을 먹었다. 막내아들만이 어미를 찾으며 집안을 뒤지는 사이 가마솥 바닥에서 뼈가 드러났다. 그때서야 제 어미가 담긴 죽을 먹은 것을 알게 된 아들들은 여기저기 늘어서 한없이 울다가 바위로 굳어버렸다. 오백장군이라 부르는 영실의 기암괴석들이 바로 그 아들들이라는 것이다. 막내아들은 제주 서쪽 끝의 차귀도에 가서 제주를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그때 500아들이 흘린 피눈물이 어찌나 진했던지, 아직도 해마다 봄이면 진달래꽃이며 철쭉꽃으로 피어나 한라산을 온통 붉게 물들인다고 전해진다. 영실기암과 오백나한을 감상하던 사우스콧은 “제주의 자연은 이야기가 담겨 있어 더 관심이 간다”고 말했다. 그의 말이 맞다. 제주에는 온갖 설화와 1만8000 신이 사는 섬이라고 했다. 자연이 이야기를 만들고 이야기가 자연을 더 돋보이게 하는 게 제주의 자연이다.

신의 정원, 선작지왓

영실기암 너머 1600고지 일대는 한라산에서 가장 넓은 벌판 선작지왓이 펼쳐진다. ‘작지’는 자갈을, ‘왓’은 밭을 의미한다. 선작지왓은 작은 돌들이 마치 사람처럼 서 있는 드넓은 벌판인 셈이다. 그런가 하면 이곳 돌들은 주변의 돌보다 흰빛을 띠고 있어서 ‘설다’는 의미의 ‘선’과 작지왓이 더해져 지명이 만들어졌다는 견해도 있다. 백록담을 담은 한라산 주봉이 거대한 왕관처럼 놓여있는 드넓은 고원에 화산 폭발로 튀어나왔을 용암덩어리가 듬성듬성 박혀 있고, 그 사이로 진달래와 철쭉, 시로미와 눈향나무들이 무리 지어 이어진다. 겨우내 쌓였던 눈이 녹아내리고 진달래와 철쭉이 피면 선작지왓의 비경은 절정에 이른다. 눈 닿는 곳 절반은 푸른 하늘이고, 절반은 진달래와 철쭉꽃의 분홍빛이다. 영실 오백장군의 애잔한 눈물이라는 전설 속의 그 꽃이 미친 듯이 피고 또 피어 바다를 이룬다. 선작지왓에 펼쳐지는 분홍빛 바다는 황홀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그 빛에 취하노라면 눈이 시리고 가슴이 저린다. 오백장군의 전설 때문만은 아니다. 화사하지만 어쩐지 슬퍼 보이고, 황홀하지만 마냥 황홀해 할 수만은 없는 묘한 비경이 바로 봄철 선작지왓에서 만나는 분홍빛 꽃바다다. 선작지왓에는 진달래와 철쭉만 있는 게 아니다. 백리향, 설앵초, 구름송이풀, 구슬붕이같이 이름마저 앙증맞은 들꽃들이 군데군데 무리를 이루며 피어나 이 산상화원을 총천연색으로 수놓는다.

오백장군의 설화가 깃든 기암
선작지왓 비경에 가슴 시리고
딱따구리·까마귀도 친근하다

선작지왓에서는 한라산을 대표하는 동물인 노루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한때 무분별한 남획으로 멸종위기에까지 몰렸다가 노루보호운동에 힘입어 개체수가 늘어났다. 노루 못지않게 주변에서 큰부리까마귀를 자주 볼 수 있다. 새까만 털과 날카로운 눈매가 매력적인 큰부리까마귀는 몸에 다섯 가지 빛깔을 지닌 제주큰오색딱따구리와 더불어 한라산의 대표적인 텃새다. 제주큰오색딱따구리는 나무의 해충을 잡아먹고, 까마귀는 숲속의 청소부 역할을 한다. 최근에는 한라산 등산객들이 주는 도시락 입맛이 길들어 등산객이 몰리는 시간이면 수십마리의 까마귀 떼가 몰려들기도 한다.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구상나무의 최대 군락지인 한라산 구상나무 군락. 사진 제공 윤종운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구상나무의 최대 군락지인 한라산 구상나무 군락. 사진 제공 윤종운

살아 천년 죽어 백년 사는 한라산 구상나무

제주도는 지리적 위치와 해발고도, 한라산 지세의 영향으로 아열대에서 아한대 기후대까지 다양한 식물 분포를 보인다. 해안에서 한라산 정상까지 고도에 따라 해안식물대(0~200m), 초지대(200~600m), 상록활엽수림대(0~800m), 낙엽활엽수림대(600~1400m), 침엽수림대(1400~1800m), 관목림대(1600~1950m)로 구분한다. 주요 식물 종의 구성은 한반도 공통인 식물들과 일본 및 중국 등에 분포하는 식물들, 그리고 열대 및 아열대 기후에서 자라는 식물, 유럽 등의 외국으로부터 흘러들어온 외래식물 등 다양하다. 현재 제주도의 식물 종수는 한반도 전체 식물 종류인 4500여종 중 48%에 해당한다. 지리적으로 특정지역에서만 분포하는 고유종을 특산식물이라고 한다. 그 지역의 자연환경에 적응하면서 진화해온 종이기 때문에 생물학적 가치가 대단히 높다.

구상나무 군락은 전 세계 유일
그러나 최근 망가지고 있다
자연이 주는 선물은 ‘경외감’
책이나 영상으론 배울 수 없다

한라산 구상나무는 한국을 대표하는 특산식물이다. 해발 1400~1800m에 이르는 한라산 침엽수림대에는 세계적으로 한국에만 분포하는 구상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구상나무는 한라산·지리산·덕유산 등의 높은 산에서 살아가는 상록교목이다. 20m까지 자라고 잎의 뒷면이 하얀색이다. 육지부에 비해 한라산 구상나무가 주목받는 이유는 세계 최대 규모의 숲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백록담에 오르다 보면 탐방로 주변에 자생하는 구상나무를 본 적이 있을 거다. 한라산 구상나무 숲은 세계에서 유일하다. 구상나무를 처음으로 확인한 사람은 프랑스인 선교사인 포리와 타케 신부다. 그는 1902년부터 1915년까지 제주에서 포교활동을 하면서 식물표본을 채집했다. 이들은 1909년 한라산과 지리산에서 구상나무 표본을 수집해 미국 하버드대 아널드 식물원에 보냈다. 하지만 새로운 종으로 감정되지 않고 보관에 그쳤다. 그 뒤 영국의 식물학자 윌슨이 한라산에서 채집한 구상나무 표본을 기준으로 연구해 1920년 ‘아비스 코리아나(Abies Koreana)’라는 신종으로 명명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구상나무는 전나무와 함께 크리스마스트리로 인기를 끌었다. 데런 사우스콧은 영국에서 크리스마스트리로 사용한 나무의 고향이 제주라는 말을 듣고 무척 좋아했다. 애석하게도 원산지는 한국이지만 최근 들어 구상나무를 역수입하는 상황이다.

소나무과에 속하는 구상나무는 지형적인 특성상 뿌리를 깊숙이 뻗지 못하고 옆으로 길게 뻗는다. 그래서 폭설이 내리거나 바람이 세게 불면 견디지 못하고 뿌리가 뽑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땅에 뻗어 있는 잔뿌리로 생명력을 유지해 앙상한 자태가 남을 때까지 생존한다. 특유의 강한 생명력과 독특한 식생구조는 한라산이 세계자연유산구역으로 선정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제주민예총 강정효 이사장의 <한라산 이야기>를 보면 ‘살아서 천년 죽어 백년’이라고 구상나무 고사목의 아름다움을 묘사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구상나무가 빠른 속도로 고사하고 있다. 탐방로를 걸으면 고사된 구상나무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강풍에 의한 뿌리 흔들림, 토양 유실, 폭설 등으로 구상나무 숲이 사라질 처지에 놓이면서 기후변화 지표종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게다가 제주조릿대의 확산으로 구상나무는 물론 털진달래 등 한라산 고지대의 희귀식물이 위기에 몰리고 있다.

하산하는 길에 운 좋게 조릿대밭에서 뛰노는 노루 한쌍을 마주했다. 우리는 방해가 될까 싶어 걸음을 멈추고 노루를 지켜봤다.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최고의 가치는 경외감이라고 생각한다. 경외감은 자연을 마주할 때 느끼는 감정이다. 자연 앞에 서 있으면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알게 된다. 경외감은 절대 책이나 영상으로 배울 수 없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인간은 경외감을 책이나 영상으로 접하게 됐고, 더 이상 자연은 경외감의 대상이 아닌 위험하고, 지저분하고, 도시와 분리된 공간으로 여겨졌다. 최근 의학계에서 자연결핍장애라는 단어를 쓴다고 한다. 인간이 자연을 멀리하면서 발생하는 문제가 크다는 말이다.

▶필자 문경수

[전문가의 세계 - 문경수의 탐라도 탐험] (15) 영실, 자연과 설화가 얽힌 ‘신의 정원’…심심찮게 노루도 만날 수 있다


컴퓨터공학을 전공하고 ‘과학동아’에서 기자로 일한 과학탐험가다. 지난 10여년간 과학을 주제로 서호주·몽골·알래스카 등 지질학적 명소들을 탐험했다. 아시아인 최초로 미국 항공우주국(NASA) 우주생물학그룹과 과학탐사(2010년)를 했고, <효리네민박>(JTBC), <어쩌다 어른>(tvN), <세계테마기행>(EBS) 등에 출연했다. 저서로 <문경수의 제주과학탐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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