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물음표가 가슴에 화살처럼 박혔다

2019.01.02 21:48 입력 2019.01.02 21:50 수정
정여울 | 작가·문학평론가

그곳과 우리의 연결고리

멕시코 민주화운동 중 사망한 이들의 수…가늠할 수 없는 수를 대신한 의문 부호

멕시코시티 삼문화광장의 1968 민주화운동 기념비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물음표.  ⓒ이승원

멕시코시티 삼문화광장의 1968 민주화운동 기념비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물음표. ⓒ이승원

한국전쟁에 4000명 넘는 군인을 파병했던 콜롬비아
마르케스의 소설 속 늙은 대령의 모습엔 한국 파병 역사의 흔적이 있다
계엄 아래의 콜롬비아, 오지 않을 희망을 기다리던 노병

여행이 끝난 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여행이 끝난 후 그 장소를 더 깊이 사랑하게 되어, 더 많이 조사하고, 더 오래 궁리해야 깨닫게 되는 것들. 나의 라틴 아메리카는 그곳에 있을 때보다도 지금 이곳에서 뒤늦게 공부하고 탐색하며 알게 된 것들로 더욱 오래오래 마음속에서 빛난다. 여행이 끝나도 또 다른 마음속 여행이 지속되는 듯한, 더 깊고 따스한 여행. 오래오래 잔열이 식지 않는 뚝배기처럼 향긋한 뒷맛을 남기는 이런 여행이 좋다. 라틴 아메리카 여행이 끝난 뒤 여행 장소들과 관련된 작가들의 작품을 열심히 찾아보던 중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를 읽게 되었다. 이 작품을 읽으며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가 한국과도 관련 깊다는 것을 알게 됐다. 특히 콜롬비아가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유일하게 한국전쟁 당시 무려 4000명이 넘는 군인들을 파병했다는 사실도. 게다가 전쟁이 끝난 뒤 콜롬비아로 돌아간 참전용사들이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한국전쟁의 노고를 기념해 받았던 훈장까지 팔아야 했다는 이야기를 읽자 진심으로 콜롬비아의 상황이 남의 일 같지 않게 느껴졌다.

라틴아메리카의 상처 많은 역사 속에서 우리 역사의 또 다른 슬픈 얼굴을 본다
우리와 매우 멀지만 우리와 매우 닮은 그들

라틴 아메리카를 대표하는 작가이자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인 가브리엘 마르케스.

라틴 아메리카를 대표하는 작가이자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인 가브리엘 마르케스.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연결되어 있었구나.’ 바로 그런 깨달음이었다.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인 마르케스의 조국 콜롬비아는 그렇게 그의 작품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를 통해 오늘날의 한국의 독자들에게까지 어떤 간절한 메시지를 타전하고 있었다. 이 작품은 늙은 퇴역 대령과 천식을 앓는 아내가 콜롬비아 북부 강변의 한 마을에서 가난과 싸우며 15년째 오지 않는 연금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이야기다. 이 가난한 노부부의 생계를 책임지던 재단사 아들 아구스틴은 반정부단체의 비밀활동에 연루돼 9개월 전 군인에게 총살당했다. 그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아들을 마음속에서는 영원히 기다리는 것처럼, 15년 전 정부로부터 약속받았던 참전용사 연금이 나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매주 금요일 우체국에 가서 편지가 도착했는지 살펴보지만, 우체국 직원은 대령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습니다.” 그는 참을 수 없는 모멸감을 느끼면서도 이 기약 없는 기다림을 멈추지 않는다. 연금은 단지 생계의 문제를 뛰어넘어 젊은 날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대령의 인생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유일한 증거였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 집안의 거의 모든 살림은 전당포에 맡겨졌고, 사랑하는 아들이 남긴 유일한 흔적인 투계용 수탉의 모이로 아들의 친구들이 가져다준 옥수수를 죽으로 끓여 먹을 지경이 되었어도, 대령은 이 속절없는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이 기다림의 끝이 어쩌면 무참한 죽음일 수 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 “내 동료들은 모두 편지를 기다리다가 죽었습니다.”

아내는 지긋지긋한 생활고와 천식의 고통에 시달리며 남편의 기약 없는 기다림을 비난한다. 수탉만 팔면 당장의 생활고를 벗어날 수 있는데, 자신은 굶으면서 수탉의 모이는 꼬박꼬박 챙기는 남편이라니. “이건 값비싼 환상이에요.” “옥수수가 떨어지면 우리는 우리 간으로 수탉을 먹여 살려야 할 거예요.” 아내는 그러면서도 남편의 다 떨어져 버린 신발을 걱정한다. 대령이 그 너덜너덜한 신발을 신을 때마다 ‘고아원에서 막 도망친 아이가 된 느낌’이라고 말하자 아내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렇게 속삭인다. “우리는 우리 아들의 고아예요.” 그렇게 아들을 먼저 저세상으로 떠나보낸 부부는 영원히 그 아들의 고아가 되어 지독한 외로움을 공유한다. 그들은 여전히 서로를 사랑하지만, 그들이 껴안는 것은 서로의 처절한 고독이다. 그들의 기억 속에서 아들은 영원히 젊은 모습이고, 부모는 점점 나이 들어가는 채로, 그렇게 부모는 자식의 영원한 고아인 채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작중 대령이 공을 세웠던 전쟁은 콜롬비아의 천일전쟁이었지만, 이 작품의 탄생 배경에는 ‘한국에 다녀오면 뭔가 뾰족한 살 궁리가 생길 거야’라는 희망을 안고 그때까지는 이름도 알지 못했던 한국을 향해 용감하게 떠났던 콜롬비아 참전용사들의 사연, 콜롬비아 바랑키아 지역의 선착장에서 무언가를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을 보았던 작가 마르케스의 기억, 오랫동안 정부에서 지급되기로 약속된 연금을 하염없이 기다리며 괴로워하던 마르케스의 외할아버지의 기억이 얽혀 있다. 이 모든 이미지들은 ‘끝나지 않는 기다림’과 ‘버릴 수 없는 희망’이라는 테마와 연관돼 있다. 송병선 번역가의 해설을 읽다 보니 “스페인어에서 ‘기다리다’와 ‘희망하다’는 ‘esperar’라는 동사로 동일하게 표현된다”고 한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울컥하는 무엇이 가슴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올라왔다. 그렇지, 기다림은 곧 희망이었구나, 그리하여 위장을 할퀴는 배고픔 속에서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그 무엇이었구나.

오지 않는 것을 기다리는 몸짓이 유일한 일상이 되어버린 인간의 아픔, 그러나 그 안타깝고 바보 같은 기다림이 삶의 유일한 존재 이유가 되었기 때문에, 그 기다림을 포기하는 순간 자신의 삶도 끝나버릴 것 같은 절박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대령의 기다림은 무력하고 수동적인 것만이 아니다. 냄비에 끓여 먹을 식재료가 없을 때는 돌멩이를 넣어 달그락달그락 끓이며 이웃들에게 ‘우리는 배고프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는 아내 앞에서도, 대령은 그들의 마지막 재산 ‘쌈닭’을 포기하지 않는다. 쌈닭을 팔면 꽤 많은 생활비가 보장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쌈닭의 모이를 자신의 끼니보다 더 중히 여기며 애지중지 키운다. 그에게 아들이 남긴 투계는 ‘아직 우리에게 싸울 힘은 남아 있다’는 것을 증언하는 뜨거운 상징이 아니었을까.

대령의 아들을 그리워하는 친구들은 자신들이 이 쌈닭을 키워, 언젠가는 반드시 투계장의 챔피언으로 등극시킬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투계라는 게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또 언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나갈지 모르는 무시무시한 계엄 상태의 조국에 대한 상징적 저항의 의미로 다가온다. 우리가 결코 날지 못하는 닭이 아니라 언젠가는 반드시 적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쌈닭이라는 것을, 그들은 점점 기운을 차려가는 쌈닭을 보며 느끼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대령은 쌈닭이 힘을 내 다른 닭에게 용감히 맞서는 모습을 바라보며 다시 전열을 정비한다. 대령은 “커다란 것을 기다리는 사람은 작은 것은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습니다”라며 자신을 다독인다. 기다리다가 돌이 될지언정, 결코 이 기다림을 포기할 수 없는 자의 투쟁. 기다림에 인생을 건 사람에게 기다림은 단지 수동적인 몸부림이 아니라 삶의 절실한 이유이자 유일한 희망이 된다. 대령에게 기다림은 곧 눈부신 희망이었고 유일한 생존이었으며 멈출 수 없는 투쟁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마르케스의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는 나에게 라틴 아메리카판 ‘고도를 기다리며’처럼 다가왔다.

멕시코시티 삼문화광장의 1968 민주화운동 기념비. ⓒ이승원

멕시코시티 삼문화광장의 1968 민주화운동 기념비. ⓒ이승원

이 작품을 읽다 보니 멕시코시티의 역사적 장소인 삼문화광장이 떠올랐다. 멕시코시티의 삼문화광장에는 1968년 멕시코 민주화운동 중에 죽어간 사람들을 기리는 기념비가 서 있다. 나는 이 기념비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돌 위에 날카롭게 새겨져 있는 커다란 ‘물음표(?)’를 발견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의문사를 당해 사망자가 도대체 몇명인지 알 수 없고, 사망자 명단도 제대로 기록할 수 없다는 뜻으로 기념비 위에 선명한 물음표를 새겨놓은 것이었다. 그 물음표는 여행이 끝난 뒤에도 오래오래 가슴에 남아, 마치 물음표 모양을 한 날카로운 화살처럼 내 가슴에 박혀 있었다. 멕시코뿐 아니라 콜롬비아에서도, 칠레와 아르헨티나에서도, 민주화운동으로 인해 피눈물을 흩뿌리며 죽어간 사람들의 숫자를 제대로 추산하지 못한다. 어찌 이리 한국과 비슷할까. 어찌 모든 나라의 민주화운동은 이토록 쌍둥이처럼 닮은 얼굴을 하고 있을까.

대령은 이웃이었던 어느 트럼펫 연주자의 장례식에 갔다가 ‘장례행렬이 경찰 막사 앞을 지날 수 없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한다. “나는 우리가 계엄하에 있다는 사실을 항상 잊어버린답니다. 하지만 이건 폭동이 아니에요. 세상을 떠난 불쌍한 한 악사일 뿐이지요.” 평범한 악사의 죽음을 애도하는 장례식조차 마음대로 치를 수 없는 사람들. 이웃의 죽음을 슬퍼하는 의식조차 마음껏 치러낼 수 없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익숙한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이토록 찬란하고 열정적이고 여유로워 보이는 라틴 아메리카에도 이렇게 엄혹한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새삼 기억하게 된 것이다. 멕시코시티 삼문화광장의 기념비에 아로새겨진 그 물음표에는 아직 그 진상이 규명되지 않은 수많은 의문사들, 실종되어 시체조차도 찾지 못한 죽음들의 흔적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아직 제대로 위로받지 못한 수많은 영령들이 그 물음표 아래 처절하게 잠들어 있었다. 라틴 아메리카는 우리와 매우 멀어 보이지만 그 역사는 매우 닮은 점도 많다. 어쩌면 우리는 라틴 아메리카의 복잡하고 상처 많은 역사 속에서 우리 역사의 또 다른 슬픈 얼굴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정여울의 라틴아메리카 기행](20)물음표가 가슴에 화살처럼 박혔다

우리는 이렇게 어느덧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우리 자신도 모르는 순간에, 아주 많이 서로를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여행을 한다는 것은 단지 색다른 장소를 향해 훌쩍 떠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잃어버린 시간과 역사를 새롭게 발견하는 행위를 통해 그토록 멀리 떨어져 있었던 ‘그들’과 ‘우리’가 사실은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 글을 쓰다 보니 파리 셰익스피어 서점 입구에 새겨져 있었던 따스한 문구가 떠오른다. ‘낯선 사람을 냉대하지 말라. 그는 변장한 천사일지도 모르니.’ 우리 찬란한 새해에는 부디 서로를 냉대하지 말기로 하자. 당신을 잘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이해관계가 다르다는 이유로, 아무리 봐도 어여쁜 구석이 없다는 이유로, 서로를 미워하지 말자. 우리도 모르는 사이, 우리는 아주 깊이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르니까. 어쩌면 아주 깊은 인연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타인을 향한 따스한 관심, 그것이야말로 우리를 끝내 인간답게 만드는 힘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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