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슬픈 탱고’처럼 비극이 흐르는 곳 미안하다 아직 꽃피지 못한 수많은 꿈들에게

2019.01.16 21:08 입력 2019.01.16 21:11 수정
정여울 | 작가·문학평론가

아름다움 속 고통의 그림자 - 라틴아메리카의 여성들

안토니오 루이즈의 그림 ‘말린체의 꿈’(1939년)

안토니오 루이즈의 그림 ‘말린체의 꿈’(1939년)

아름다움을 찾으려 하는 노력 속에서 문득 죄책감을 느끼는 순간들이 있다. 라틴 아메리카의 아름다움을 찾아 떠난 여행자들은 아르헨티나의 탱고에 열광하고, 오페라극장을 개조한 알 아테네오 서점의 놀라운 인테리어에 감탄한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양쪽에서 감상할 수 있는 이구아수폭포의 웅장함에 놀라고, 카리브해의 파도가 다이아몬드처럼 투명하게 부서지는 아바나의 말레콘 앞에서 황홀경을 느낀다. 여행 속에서 우리는 마치 어떤 의무감에 사로잡힌 듯 그저 속절없이 아름다운 것들을 발견하려 한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들 속에는 지워지지 않는 아픔의 흔적들, 아직 끝나지 않은 고통의 흔적들이 숨어 있다. 라틴 아메리카의 대부분은 스페인의 잔혹한 식민통치 경험을 지니고 있으며, 브라질은 포르투갈 식민지였다는 사실은 여전히 끝나지 않은 역사적 트라우마를 상기시킨다.

식민주의의 폭력이 다행히 지금은 끝난 고통이라면, 여성을 향한 끊임없는 납치와 강간·살해 같은 강력범죄는 아직 끝나지 않은 고통이다. 인구 600만명의 작은 나라 엘살바도르에서는 2017년 무려 469명의 여성이 살해됐고, 그나마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 중에서는 성차별이 상대적으로 덜한 아르헨티나에서도 30시간에 한명 꼴로 여성이 살해되고 있다고 한다.

알폰소 아라우 감독의 영화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의 한 장면.

알폰소 아라우 감독의 영화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의 한 장면.

아름다운 라틴 아메리카에서 결코 아름답지 않았던 모습은 바로 여성을 향한 끝나지 않은 차별이었다. 라틴 아메리카의 수많은 여성들은 여전히 사회진출의 기회가 많지 않고 육아 부담을 전적으로 담당하며 가정폭력, 성폭력 위험에 노출돼 있다. 영화로 제작돼 호평받은 라우라 에스키벨의 소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권미선 옮김·민음사)을 다시 읽으며, 지금의 라틴 아메리카 여성들은 이보다 훨씬 나은 환경에서 살고 있기를 빌었다. 주인공 티타가 겪고 있는 성차별은 전통과 관습의 이름으로 정당화돼 더욱 문제적이다. 사랑하는 남자 페드로가 청혼하러 오지만, 어머니 마마 엘레나는 ‘막내딸은 대대로 어머니의 노후를 보살피고 책임져야 한다’는 이유로 티타의 결혼을 가로막는다. 티타는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는 질문들에 사로잡힌다.

소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을 다시 읽으며, 지금의 라틴아메리카 여성들은 소설보다 나은 환경에서 살고 있기를 빌었다.
“제대로 살고 싶어요. 한 번이라도…” 라틴의 황홀함과 화려함 뒤, 이 땅 여성들의 절규와 트라우마는 여전히 소설처럼 아프다.
부에노스아이레스 거리에서 만난 화가 할아버지와 춤추는 소녀. 이 아이가 만나게 될 세상은 천배 만배 행복하기를…

“만일 티타가 결혼을 할 수 없고, 그래서 자식도 낳을 수 없다면 티타가 늙은 뒤에는 누가 그녀를 돌본단 말인가? 그런 경우에는 무슨 해결책이 있나? 어머니를 돌봐야 하는 딸인 경우, 부모가 죽은 다음에는 아예 오래 살기를 바라지 말아야 하는 건가? 결혼을 했어도 아이를 낳지 못한 여자는 어떻게 되지? 그때는 누가 그들을 돌보나? (…) 그로 인해 희생되는 딸들의 의견은 들어보기라도 한 건가?” 티타는 결혼은커녕 연애도 할 수 없었으며, 그녀가 요리에 매달리는 이유는 오직 부엌에서만 자유를 허락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린 딸을 철저히 희생시킴으로써만 간신히 유지되는 이 가족의 겉만 번드르르한 평화는 사실 행복을 가장한 학대였으며, 여성의 가능성을 송두리째 짓밟는 악습이었다. “티타가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는 티타를 조금씩 조금씩 죽여왔고, 아직까지도 완전히 죽이지는 않고 있었다. 페드로와 로사우라의 결혼으로 티타는 메추리처럼 고개가 꺾이고 영혼도 꺾였다.”

우여곡절 끝에 티타의 언니 로사우라가 페드로와 결혼하게 되고, 깊이 상처받은 티타는 그 쓰라린 사랑의 슬픔, 그리고 전통과 인습에 대한 반항심을 가득 담은 요리를 내놓게 된다. 티타의 억눌린 감정과 욕망은 그녀의 놀라운 요리솜씨 속에 깃들어, 그녀의 음식을 먹은 사람들은 그녀의 마음을 그대로 느끼게 되는 마법 같은 효과를 발휘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친언니와 결혼하는 슬픔과 분노를 가득 담은 웨딩 케이크는 모든 하객들이 마음 깊은 곳에 간직한 ‘사랑의 슬픔’을 자극해 결혼식을 구토와 통곡으로 얼룩지게 한다. 페드로에 대한 끝나지 않은 사랑과 열정을 가득 담아 만든 ‘장미 꽃잎을 곁들인 메추리 요리’는 둘째 언니 헤르투루디스를 에로스의 화신으로 만들어 마침내 그녀는 가출해 집안에서 유일하게 ‘마음껏 사랑할 자유’를 얻은 사람으로 만든다.

소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을 쓴 작가 라우라 에스키벨.

소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을 쓴 작가 라우라 에스키벨.

이런 마법 같은 스토리텔링에 숨은 억압은 바로 ‘막내딸은 늙은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결혼을 해서는 안된다’는 얼토당토않은 인습이었다. 그런데 이 지독한 악습으로 누구도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더 커다란 충격이다. 티타의 어머니는 항상 욕구불만에 가득한 채로 딸을 괴롭히고 학대하며, 동생의 연인 페드로와 결혼한 로사우라도 늘 소화불량과 애정결핍에 시달리며 결국 죽게 된다. 청혼을 거절당하자 사랑하는 여인 티타와 어떻게든 함께하겠다는 일념으로 그녀의 언니와 결혼한 페드로 또한 티타를 향한 불가능한 사랑에 매달리며 괴로워한다. 라틴 아메리카 문학의 ‘마술적 리얼리즘’을 상상하며 이 소설을 읽으면 큰코다친다. 이 소설은 원시적이고 야생적이며 초현실적인 매력으로 가득한 전형적인 라틴 아메리카 문학이 아니라, 엄마의 풀지 못한 원한과 삶에 대한 불만족이 끊임없이 딸들에게 전가되는 무시무시한 심리 스릴러 같다. 그래서 더욱 가슴 아프다.

오래전 영화로 봤을 때는 로맨틱하고 애틋하게 느껴졌던 주인공 페드로의 모습이 소설 속에서는 마초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그는 티타에게 새로운 사랑이 나타났을 때, 마침내 티타를 자유롭게 해줄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을 때도, 그녀에게 과도한 집착을 보이며 끝내 그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 하기 때문이다. 결국 그의 잘못된 선택 때문에 아내 로사우라도, 처제이자 연인인 티타도 결코 행복한 삶의 주인공이 되지 못한다.

멕시코의 대표적 페미니즘 소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은 ‘요리’밖에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길이 없었던 한 여성의 평생에 걸친 사랑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여성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끝내 얻을 수 없었던 시대의 뼈아픈 현실을 담아낸 이야기이기도 하다. 티타는 자신을 평생 괴롭히던 어머니가 죽고 나서도 그녀의 영혼이 ‘귀신의 목소리’가 돼 집안을 떠도는 듯한 환각에 시달린다. 트라우마의 내면화란 이렇게 무섭다. 트라우마가, 폭력의 상황이 끝난 뒤에도, 그 상처와 잔상은 계속 피해자의 마음속에 남아 ‘더 나은 삶’을 살고자 하는 의지를 꺾는다. 이 작품은 요리라는 일상적 노동을 삶을 바꾸는 예술로 승화시키는 아름다운 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지만, 요리로 밖에는 자신의 짓이겨진 마음을 표현할 길 없었던 한 여인의, 가혹한 차별로 가득한 세상을 향한 절박한 외침으로 다가온다. 티타뿐 아니라 자신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전 세계의 모든 여성들은 이렇게 절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제대로 살고 싶어요. 한 번이라도 내 뜻대로 살고 싶어요.

식민지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이중삼중의 착취와 억압에 노출되는 것을 의미한다. 멕시코 화가 안토니오 루이즈의 ‘말린체의 꿈’은 여성을 향한 복합적인 착취와 이중적인 시선의 흔적을 보여준다. 이 그림의 주인공 말린체는 스페인의 정복자 코르테스의 안내자이자 통역가였고, 그의 연인이기도 했다. 말린체가 훌륭하게 통역할수록 멕시코는 스페인의 손아귀에 손쉽게 넘어갈 위험에 처했고, 갈색 피부의 원주민 말린체와 스페인의 정복자이자 백인이었던 코르테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메스티소가 돼 차별받아야 했다. ‘말린체의 꿈’이라는 그림에서 이 소녀의 잠든 모습은 그녀의 현실(식민지 멕시코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과 꿈(스페인식 교회와 스페인식 건물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꿈)이 비극적으로 공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정복자 코르테스의 통역가 말린체는 민족을 배반한 여인으로 비판받았지만,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원주민 소녀 말린체는 멕시코를 꾸밈없이 사랑했으며, 억압·착취당하는 멕시코 여성의 삶을 개선시키기 위한 꿈 또한 꾸고 있었던 것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카미니토 거리에서 만난 할아버지 화가와 그 옆에서 춤을 추는 소녀. ⓒ이승원

부에노스아이레스 카미니토 거리에서 만난 할아버지 화가와 그 옆에서 춤을 추는 소녀. ⓒ이승원

탱고의 발상지로도 유명한 라보카 지구의 카미니토 거리를 걸으며 나는 아름다운 사람들을 발견했다. 하루종일 관광객들에게 아름다운 아르헨티나 모습을 그려주는 화가 할아버지 곁에서 노란 원피스를 입은 소녀가 춤을 추는 모습이었다. 할아버지는 소녀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그림을 그렸다. 아름다운 카미니토 거리는 할아버지의 그림과 소녀의 춤으로 더욱 눈부시게 빛나는 듯했다. 소녀는 할아버지에게 그림에 대해 이것저것 묻기도 하고, 혼자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기도 하고, 지나가는 관광객들을 바라보며 싱긋 웃어주기도 했다. 저 천진난만한 소녀가 자라나 만날 세상은, 멕시코 소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의 고통받는 여인 티타보다도, 칠레의 소설 <영혼의 집> 속에서 평생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쳐볼 수 없었던 클라라보다도 천배, 만배 행복한 여성들의 세계가 돼야 하지 않을까.

얼마 전 시인 에이드리언 리치의 작품 <최루 가스(Tear Gas)>를 읽다가 오래오래 반짝이는 혁명의 열쇠를 얻은 듯 기분이 좋아졌다. “열쇠 한 다발을 온통 이리저리 끼워 맞추면서 문을 열려고 하는데/ 과연 그 문이 원래 잠긴 것인지, 오랫동안 방치되어 고장이 난 것인지/ 모르는 채로/ 끝도 없이 계속해서 열쇠를 하나하나 끼워 보다가 문득 열쇠 뭉치를 던져버리고는/ 주변에 혹시 도끼가 없는지 노려본다/ 어쩌면 세상은 이처럼 변화되어야 하지 않을까/ 어쩌면 인생은 이렇게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지배와 압제에 대항하는 언어란 이렇게 용감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 그동안 나는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 세상에서 여성들에게는 결코 열리지 않는 문을 열기 위해, ‘꼭 맞는 열쇠’를 찾으려고만 했구나.

[정여울의 라틴아메리카 기행](21)‘슬픈 탱고’처럼 비극이 흐르는 곳 미안하다 아직 꽃피지 못한 수많은 꿈들에게

어떤 열쇠로도 열리지 않는 문이라면, 망치로, 도끼로, 폭탄으로 부수어버릴 수는 없을까. 자물쇠를 만든 사람들은, 우리가 반드시 풀어야 할 문제들을 만드는 사람들은, 결국 ‘억압하는 자들’이니까. 억압하는 자들의 언어와 에티켓을 향하여 맞춤 서비스를 하는 열쇠가 아니라, 저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언어로, 저들이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상상력으로, 힘으로, 용기로, 이 그칠 줄 모르는 불평등과 억압에 맞서 싸워야 하지 않을까. 시인 리치는 ‘파워’라는 글에서 ‘여성들의 상처는 그녀들의 힘과 동일한 근원에서 비롯되는 것’(her wounds came from the same source as her power)임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아버지에게 학대당하고, 남편에게 무시당하고, 아들에게 착취당하는 여인들의 트라우마 위로 피눈물이 흐르더라도, 결국은 그 뼈아픈 트라우마 위에서 우리들의 가장 큰 용기 또한 용솟음쳐 오를 것이다. 작가·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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