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내가 먹는 것의 ‘원물’을 알아야 잘 먹고 ‘맛의 줏대’도 찾아

2017.11.24 21:36 입력 2017.11.24 21:43 수정

음식문헌 연구자 고영과 천안 효덕농장·광덕사 호두나무

‘명사 70인과의 동행’ 참가자들이 지난 18일 충남 천안 효덕농장에서 창고에 숙성 중인 치즈를 살펴보고 있다. 효덕농장은 농장 앞 논밭에서 직접 재배한 목초, 보리, 피 등을 젖소에게 먹이고 그 젖소로부터 짠 우유로 유가공품을 만든다. 천안 |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명사 70인과의 동행’ 참가자들이 지난 18일 충남 천안 효덕농장에서 창고에 숙성 중인 치즈를 살펴보고 있다. 효덕농장은 농장 앞 논밭에서 직접 재배한 목초, 보리, 피 등을 젖소에게 먹이고 그 젖소로부터 짠 우유로 유가공품을 만든다. 천안 |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지난 18일은 늦가을을 비집고 겨울이 찾아온 날이었다. ‘명사 70인과의 동행’ 버스가 출발하는 서울 지하철 시청역 부근의 기온은 영하 4도까지 떨어졌다.

동행 ‘참가단’ 40여명이 이날 찾아가기로 한 곳은 충청남도 천안에 있는 ‘체험목장’과 ‘광덕사’였다. 좀 더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목장의 젖소들과 사찰 안에 있는 400년 넘은 호두나무 한 그루. 이런 추위를 뚫고 굳이 가야 할 가치가 있는 곳인가 싶어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그러나 이날 참가단과 동행한 음식문헌 연구자 고영씨는 “망설임 없이 선택하고 추천한 장소”라고 말했다.

그는 천안행 버스에서 ‘아무나 갈 수 있는’ 체험목장을 택한 이유를 설명했다. “통계를 찾아보니 2016년 한국인이 1년 동안 우유 138만t을 먹었습니다. 쌀보다 더 많이 먹은 겁니다. 그런데 이 어마어마한 식료품이자 자원인 우유는 100년 전쯤에야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갑자기 ‘쓱’ 들어왔죠. 그래서 많이는 먹지만, 다양하게는 먹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쌀에서 느끼는 감각과는 다르죠. 어쨌든 참 중요한 자원인데, 이게 어떻게 생기고, 어떻게 우리 입안에 들어오는지 실감할 기회가 별로 없습니다.”

천안에 도착하기 전 고씨는 참가단에 퀴즈를 냈다. “ ‘마스카포르네’는 버터일까요, 치즈일까요? 또 ‘리코타’는 버터일까요, 치즈일까요? 대답 잘 못하시겠죠. 이건 서양인들이 두부와 비지를 구분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 하나 물어볼게요. 호두과자는 빵일까요, 과자일까요?” 지루하게 고속도로를 달리던 버스 안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름 그대로 과자인가? 퀴즈를 낸 것 보니 빵인가?” 웅성대는 참가단을 향해 고씨가 말했다. “자~알 생각해보세요. 답은 나중에 알려드릴게요”

음식문헌 연구자 고영씨(오른쪽)가 충남 천안 효덕농장에서 한국 낙농업의 역사와 음식문화사를 설명하고 있다. 이상훈 선임기자

음식문헌 연구자 고영씨(오른쪽)가 충남 천안 효덕농장에서 한국 낙농업의 역사와 음식문화사를 설명하고 있다. 이상훈 선임기자

2시간가량을 달려 천안 효덕농장에 도착했다. 농장 진입로 좌우로 펼쳐진 논바닥에는 ‘공룡알’ 또는 ‘마시멜로’라고 부르기도 하는 ‘볏짚 곤포 사일리지’가 군데군데 놓여 있었다. 트랙터에 곤포 사일리지 기계를 달아 추수하고 남은 볏짚을 덩어리로 만 뒤 발효액을 뿌린 것이다. 그런 다음 비닐로 단단하게 감아 숙성시키면 젖소의 사료가 된다. 소가 먹는 먹이가 곧 우유가 된다고 ‘단순무식’하게 생각해보면 ‘공룡알’은 우유의 시작점인 셈이다.

김호기·이선애씨 부부가 운영하는 효덕농장에는 젖소가 70마리가량 있다. 남편 김씨가 1986년 시작했고, 결혼과 함께 부인 이씨가 합류했다. 처음부터 ‘건강한 우유’를 생산하는 데 주력했고 2009년에는 아예 유기농장으로 전환해 인증을 받았다. 이씨는 농장에서 생산한 유기농 우유로 치즈, 요구르트 등을 만들어 판매한다. 이런 생산과정을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효덕농장의 유제품 브랜드 ‘썬러브’는 이선애씨의 이름(Sun+사랑·愛)에서 따왔다.

한국에서 낙농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00년이 채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수준은 한국이 낙농업 기술을 배워 온 일본 못지않게 높다. 고씨는 그 비결을 ‘콩과 된장’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콩과 우유의 공통점은 단백질과 지방이 풍부하다는 것뿐 아니라 발효식품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라며 “세계 어느 지역에서는 콩으로 된장, 간장 등을 만들었고, 어느 지역에서는 우유로 치즈와 버터 등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 ‘상했다’와 ‘발효했다’는 한 끗 차이로 달라지는 것인데, 한국 낙농가는 (콩을 가공하며 익힌) 그 감각을 우유 제품에서도 잘 포착해 여기까지 온 것”이라고 말했다.

효덕농장은 한국 낙농업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농장 앞 논밭에서 목초와 보리, 피 등을 재배해 젖소에게 먹이고, 그 젖소로부터 짠 우유로 유가공품을 만든다. 또 농장을 개방해 체험프로그램도 운영한다. 고씨가 말했다. “낙농업이 한 단계 더 도약하려면 (이를 먹는) 보통사람들의 이해가 필요합니다. 뭐가 더 좋은지 아는 사람들이 널리 있어야 그 산업에 기반이 생깁니다. 그래서 목장에 온 겁니다.”

효덕농장을 떠나는 버스 안에서 그는 앞서 낸 퀴즈의 정답을 알려줬다. “마스카포르네(크림치즈의 일종)는 크림입니다. 이것이 들어가는 대표적인 음식이 바로 티라미수(이탈리아 디저트의 일종)죠. 리코타는 ‘두부의 비지’ 같은 겁니다. 사실 우리는 마스카포르네, 치즈, 리코타를 잘 구분하지 않습니다. 익숙하지 않기도 하고요.” 이어 “생각하면서 먹지 않으면 상상력도 없습니다. 여러분도 ‘내 감각의 줏대’를 생각하면서 먹어보면 좋겠습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아야 하고, 내가 먹는 음식의 ‘원물’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맛의 설계’를 할 수 있습니다.”

그 추운 날에 목장을 찾아가 송아지를 만나고, 산중의 절까지 찾아가 덩그러니 서 있는 호두나무를 보고 오는 것, 이 모든 것은 스스로 맛을 ‘설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공부란 것이었다. 고씨가 다시 덧붙였다. “잘 먹고 잘 살고 싶으면 농민을 만나고 다니세요. 그리고 그분들한테 직접 물어보세요.”

음식문헌 연구자인 고영씨는 원래 고전문학을 공부했다. 조선후기 한문 단편을 번역해 모은 책도 냈고, 판소리계 소설을 새로 번역하기도 했다. 음식문화와 관련된 글은 2012년이 되어서야 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미식가도 아니고 미식에 대한 관심도 없다”고 말했다.

고전문학을 번역하다 보면 항상 그 이상의 구체적인 정보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조총’을 쏘는 장면을 묘사하려면 조총(화승총)은 심지에 불을 붙이고 하나, 둘, 셋, 그러니까 한 3~4초 지나서 ‘빵’하고 발사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또 흑색 화약은 습기를 잘 먹는다는 점, 그래서 보관을 잘못하면 불발이 많다는 점, 발사 뒤에 연기가 무척 많이 나서 시야를 가린다는 점 등도 생각하고 번역해야 한다. 그래야 1619년 샤르후 전투(후금의 침략에 대항해 명나라와 조선, 여진족이 참전한 전투)에서 조선군이 조총을 믿고 개활지에 진을 쳤다가 후금 기마대에 몰살당한 상황을 제대로 그려낼 수 있다.

음식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번역을 하다 보면 음식분야가 유독 힘들었다”면서 “먹는다는 것은 구체적인 실제인데 그것을 먹기 전까지 행동을 파악하기가 너무 어려웠다”고 말했다. 이를테면 ‘국수를 한 그릇 먹었다’고 하면 그 앞에 면은 어떻게 만들었는지, 또 그 앞에 밀가루는 어떻게 제분했는지 등등을 알아야 했다.

과거 사람들이 먹던 ‘맛’도 알기 어려웠다. 그는 “지금 우리가 먹는 감귤은 영어권에서 ‘사쓰마 오렌지’(온주밀감)라고 부르는 종”이라며 “원래 먹던 재래종 감귤은 농업시험소나 지역의 오래된 감귤나무에나 있지, 우리 일상에는 들어와 있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음식문화를) 따로 공부하다 결국 내가 해야 할 일은 이쪽이라 생각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설명을 들으니, 광덕사 안에 서 있다는 호두나무의 모습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칼바람까지 몰아치는 가운데 동행 참가단은 광덕사에 도착했다. 음식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니 추위 따위는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천연기념물인 충남 천안 광덕사의 호두나무. 약 700여년 전에 심었다는 ‘전설’이 있지만 실제 나이는 400살 정도로 추정된다. 이상훈 선임기자

천연기념물인 충남 천안 광덕사의 호두나무. 약 700여년 전에 심었다는 ‘전설’이 있지만 실제 나이는 400살 정도로 추정된다. 이상훈 선임기자

광덕사 호두나무는 1998년 천연기념물 제398호로 지정됐다. ‘전설’에 의하면 약 700여년 전인 고려 충렬왕 16년(1290년) 9월에 영밀공 유청신 선생이 중국 원나라에 갔다가 임금의 수레를 모시고 돌아올 때 호두나무의 어린나무와 열매를 가져와 어린나무는 광덕사 안에 심고, 열매는 유청신 선생의 고향집 뜰 앞에 심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 심은 나무가 지금의 광덕사 호두나무인지는 근거자료가 없다. 실제로 이 나무의 나이는 700년보다 한참 ‘어린’ 400살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다만 천안의 광덕산 일대가 한국 호두나무의 시배지(처음 심은 곳)라는 데는 별다른 이견이 없는 듯하다.

호두의 ‘풍미’는 품종보다는 생육 환경이 더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고씨는 “광덕산처럼 물이 잘 빠지고 양지바른 산비탈이 가장 적합한 곳이라고 농민들에게 들었다”며 “좋은 품종이라도 잘 키워야 풍미가 나온다”고 말했다.

그는 호두나무 앞에서 참가단에 물었다. “호두과자, 참 좋고 소중한 과자인데요, 과연 맛있습니까?” 퀴즈의 나머지 정답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고씨의 의도대로 참가단이 따라왔다. “너무 달아요. 그런데 과자예요, 빵이에요.” 고씨는 기다렸다는 듯이 설명했다. “제빵과 제과를 구분하는 것은 얕은 지식을 자랑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물성의 정체, 원래 모습을 알 때만 우리가 생각하면서 뭔가를 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과서대로 하면 빵과 과자를 구분하는 것은 간단합니다. 발효하면 빵이고 아니면 과자입니다. 또 노골적으로 당과 유지와 맞닿으면 과자, 소금과 부풀리는 재료, 밀가루만 들어가면 빵입니다.” 참가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과자는 3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색상이 눈에 띄어야 하고, 조형미가 있어야 하며, 단맛에 수렴하는 풍미가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과자는 입에 달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제대로 된 바클라바(터키 과자)는 먹을 때 코피가 ‘팡’ 하고 날 정도로 달아요. 그렇다고 달기만 한 것도 아닙니다. 조화와 균형이 있습니다. 그러나 호두과자는….”

고씨는 “길거리에서 먹는 음식도 이 정도 역사가 됐으면 한 번의 갱신이 있어야 한다”면서 “그 갱신은 그것 하나도 귀한 줄 아는 사람이 늘어야 생긴다”고 말했다. 이어 “호두과자는 기본기로 승부하는 과자인데, 이제는 전국 어디에서나 막 사먹는 과자가 됐다”며 “흔하다고 하대하고, 싸다고 하대하니까 이제는 맛있는 호두과자를 찾기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내 맛의 줏대’를 찾아 ‘맛을 설계’하는 여행을 마칠 무렵 고씨는 다시 강조했다. “비싸다고 좋은 것을 얻을 수 없는 세상이 됐습니다. 잘 먹으려면 원물에 대한 정보와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동행 참가단 버스가 천안삼거리 휴게소에 잠시 들렀다. 많은 사람들이 ‘휴게소표’ 호두과자를 사서 입에 넣었다. 표정들은 사뭇 진지했다.

[명사 70인과의 동행] (67) 내가 먹는 것의 ‘원물’을 알아야 잘 먹고 ‘맛의 줏대’도 찾아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