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천년 요새 온달성·고구려사 새긴 중원비…“동행, 역사 답사 넘어 미래 설정하는 여정”

2017.12.15 19:08 입력 2017.12.15 22:01 수정

소설가 김진명과 온달산성·중원 고구려비

<b>온달산성, 아름다운 풍광을 선사하다</b> 충북 단양의 온달산성은 험한 산줄기 위에 세워진 ‘요새형’이면서도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온달산성, 아름다운 풍광을 선사하다 충북 단양의 온달산성은 험한 산줄기 위에 세워진 ‘요새형’이면서도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김진명은 ‘민족’과 ‘역사’에 꽂힌 소설가였다. 그를 일약 스타 작가로 올려놓은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나 지금도 집필 중인 <고구려> 같은 소설을 보면 그가 얼마나 민족과 역사에 관심이 많은지 알 수 있다.

지난 9일 소설가 김진명과 함께 경향신문 독자 34명이 충북 단양 온달산성과 충주 중원 고구려비를 찾았다. 버스는 기자, 신문사 직원, 가이드 등으로 가득 찼다. 참가를 희망하는 대기자도 많았다고 한다. 이날 행사는 경향신문이 지난 2년 동안 진행해온 ‘명사 70인과의 동행’ 마지막 일정이었다.

동행 일정 내내 김진명은 한국인과 민족에 대해 얘기했다. 소설 판매기록이 1500만부나 되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말도 술술 잘했다. 작가들은 눌변이라는 통념이 김진명에겐 통하지 않았다. 농도 섞고, 분위기도 띄우며 웃음을 유도했다. 이날 기온은 서울이 최저 영하 4도, 충주는 최저 영하 8도. 포근하던 날씨가 제법 매서워지던 때였지만 동행 내내 훈훈했다.

오전 8시. 김진명은 서울 시청역 앞으로 찾아왔다. 김진명은 충북 제천에 산다. 동행 목적지인 단양과 충주에서 지척이다. 오전 4시30분에 일어나 5시30분 차를 타고 서울 시청역 앞으로 왔다고 했다.

“요즘 사람들은 효율과 결과만 중시합니다. 편한 것보다는 같이 간다는 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서 출발부터 합류하려고 일찍 올라왔습니다.”

버스 안에서 그의 고구려 이야기가 시작됐다.

“미국 의회에서 고구려에 관한 자료를 보내달라고 요구했을 때, 우리는 손바닥 두께의 자료를 보냈지만, 중국은 시내버스 두 대 높이의 자료를 보냈다고 합니다. 고구려가 우리 것이라는 ‘피상적인’ 주장을 하지만 중국에 비하면 너무 열악한 수준이죠.” 이야기는 이어졌다. “고구려 역사는 시민들도 잘 몰라요. 삼국지와 비슷한 시기인데, 삼국지의 시시한 장수 이름까지 꿰고 있는 사람들이 고구려의 을불은 몰라요. 미천왕, 고국원왕, 고국양왕 등 왕 이름도 잘 모르죠….”

그의 이야기는 결국 ‘한국’에 가닿았다. 한민족이 왜 한민족인지, 우리 민족의 기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풀어냈다.

그는 “역사는 흘러간 기록이 아니다”라며 “과거 우리 정신의 기록으로, (동행 프로그램도) 과거의 기록을 보러가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방향을 설정하러 가는 것”이라고 이번 동행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했다.

버스 안에서 슬그머니 물었다. ‘왜 민족과 역사에 그리 관심이 많으시죠?’

“고교 때부터 역사에 관심이 있었어요. 왜 우리 역사는 이렇게 비참한가, 우리는 이렇게 당해왔는가? 지정학적으로 보면 한국은 미·러·중·일 4대 열강에 포위된 형국이죠. 결국 이런 환경에 있다보니 한국인이라는 시각으로 보게 된 거예요.”

그게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란 소설을 쓰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1993년 북한이 핵개발을 한다는 이유로 미국이 북한을 폭격하려고 했으나 국내 언론도 잠잠했고, 지식인들도 조용했다고 한다. 그래서 <무궁화…>를 썼다. 불행한 가족사도 작가의 길에 들어서는 데 일조했다. 그의 형은 서울대 대학원을 마치고 군에 입대했다. 서슬퍼런 1980년대 광주의 참상을 알고 군 내에서 “전두환 물러가라”며 시위를 했다고 한다. 초주검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 형은 몇 해를 앓다가 결국 세상을 떠났다.

첫번째 목적지 단양 온달산성은 남한강의 군사요충지다. 김진명은 <고구려>를 쓰기 위해 10여차례 이 지역에 왔다고 했다. 성곽은 크게 보면 담장(wall)이나 요새(fortress)로 나눌 수 있다. 도시를 둘러싼 경계선의 경우 성곽은 담이다. 유홍준에 따르면 한양도성은 ‘시티(city) 월’이다. 반면 험준한 산줄기에 방어목적을 위해 세운 산성은 요새, 즉 포트리스다. 온달산성은 누가 봐도 요새다. 이 험한 산줄기에서 싸우는 게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데 온달산성에 오르면 남한강이 휘어 흐르는 모습이 보인다. 기자도 과거 여러 차례 산성에 올라봤다. 올 때마다 그 아름다운 풍광에 감탄했다.

사적 제264호인 온달산성에는 온달이 배수진을 치고 신라와 싸웠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삼국사기>에도 ‘온달이 아단성 아래에서 신라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답사여행의 길잡이 충북편>에 따르면 아단성이 온달산성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경기도 구리의 아차산성이라는 얘기도 있는데, 충북 단양 영춘의 옛 이름이 을아단인 것을 보면 아무래도 아단성을 온달산성으로 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썼다. 여기서 을은 을지문덕에서처럼 위(上)를 뜻하는 말이다. 영춘 인근에는 온달이 장사 지냈다는 상리나루나, 온달이 군사를 주둔시켜 망보게 했다는 군간(軍看)나루(군간교) 등이 있다.

잘 알려진 ‘온달설화’는 고구려 평원왕이 딸 평강공주가 울 때마다 ‘국민 바보’ 온달에게 시집을 보내겠다고 한다. 다 커서 시집갈 때가 됐을 때 평강공주는 “아버지가 온달에게 시집가라고 했으니 가겠다”고 고집을 부려 결혼한다. 여기에 대한 김진명식 해석은 이렇다.

“온달과 평강공주의 이야기가 실제로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고구려는 양반 상놈으로 평생 신분이 고착된 국가는 아닌 것 같아요.”

그러면서 덧붙였다. “수나라 양제가 113만 군사를 이끌고 왔습니다. 밥짓고 도와주는 사람들까지 합하면 200만명이 넘는데 그걸 수십만명이 막아냈습니다. 똘똘 뭉쳐 외세에 대항해 승리로 이끈 것은 고구려 정신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마지막 목적지는 중원고구려비이다. 충주에 있는 중원고구려비는 남한에 남아있는 유일한 고구려시대 돌탑이다.

“700년 역사를 가진 나라인 고구려가 (고구려인이 쓴) 단 한 장의 종이, 죽간조차 남아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세계 역사에 유례가 없습니다. 이보다 오래된 6000~7000년 나라들도 역사기록이 있죠. 글자로 쓰인 단 두 개의 기록, 중국 지안(集安)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와 충주에 있는 중원 고구려비입니다.”

그는 광개토대왕비에 대해 먼저 이야기했다.

“광개토대왕비를 처음 발견했을 때 중국 학자들이 매우 기뻐했습니다. 이렇게 큰 석탑을 당연히 중국인들이 만들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내용을 보면서 고구려비라는 게 확인됐죠.”

광개토대왕비에 나온 비문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일본은 임나일본부설을 제기했다. 문제가 된 구절은 이렇다. ‘왜이신묘년래도해파백잔○○신라이위신민(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 일본인들은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 유민과 ○○, 신라를 격파하고 백성으로 삼았다’고 해석했다. 마모돼 글자를 알 수 없는 ○○에 ‘임나’를 집어 넣어 임나라는 식민지가 있었다는 주장이다. 현재는 한·일 학자 모두 임나일본부설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고 있다. 김진명은 이 비문을 보기 위해 1990년대 초반에 중국으로 건너가 광개토대왕비를 연구해온 중국인 학자 왕젠췬(王健群)을 만나려고 했단다.

“갈 때마다 왕젠췬이 피했어요. 전화를 해서 간다고 하면 출장을 가버리고, 기다린다고 해도 안 오고 그랬죠. 왕젠췬의 사후에 그가 남긴 필름 기록에서 훼손되기 전 ○○부분 중 한글자가 동(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러면 해석이 달라지거든요. 그걸 들고 일본에 가서 일본 도쿄대학장이던 광개토대왕비 연구자에게 따졌죠. 학자적 양심을 걸고 이야기해보라. 담배를 일곱 개비 정도 피우더니, 임나일본부는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더라고요.”

그의 이야기는 종횡무진했다. 빅뱅에서 시작해 사드까지 이어졌고, 중국과 일본까지 왔다갔다 했다.

<b>고구려의 한강 이남 진출을 증명하다</b> 남한에 남은 유일한 고구려 돌탑인 충북 충주의 고구려비 앞에서 김진명 작가가 손으로 비를 가리키며 설명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고구려의 한강 이남 진출을 증명하다 남한에 남은 유일한 고구려 돌탑인 충북 충주의 고구려비 앞에서 김진명 작가가 손으로 비를 가리키며 설명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국보 제205호 중원 고구려비는 광개토대왕비에 비하면 작은 편이다. 광개토대왕비는 높이가 6.4m에 너비는 2m, 무게는 37t이나 될 정도로 거대하다. 중원고구려비는 높이 2.03m, 폭 55㎝다. 처음 이 비석을 발견했을 때 학자들은 신라의 석탑으로 봤다. 조사결과 고려 태왕이라는 명문이 발견돼 고구려임을 알게 됐다. 이 비가 발견되면서 고구려사가 재조명됐다. 중원고구려비 기념관의 문화유산해설사는 고구려가 왜의 침략을 받은 신라를 돕기 위해 군사를 파견해 도왔다고 한다. 고구려는 즉각 철수하지 않고, 일부 병력을 남겨놓고 계속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이 해설사의 설명이다.

처음 발굴하던 당시 이 비석이 도로변에 있어서 조사에 어려움이 많았다. 해서 비석을 현재 기념관 자리로 옮기자 입석마을 사람들이 마을 수호석을 옮긴다고 반대했단다. 하지만 국가가 나서면 조사와 관리를 더 잘할 수 있다고 주민들을 설득했다고 한다. 어찌 됐든 고구려인이 한강 이남 지역 깊숙이까지 진출했던 명백한 증거가 바로 중원고구려비란 얘기다.

‘동행’의 마지막 답사에는 여러 번 참여했던 독자들이 나왔다. 한 참가자는 ‘동행’이 끝나는 게 아쉽다며 한산 소곡주 됫병(1800㏄) 2개를 가져와 가이드에게 맡긴 뒤 점심식사 때 풀었다. ‘됫병’ 제공자를 묻자, 가이드는 소곡주를 가져온 참가자가 이름 밝히기를 꺼린다고만 얘기했다. 김영구씨는 ‘동행’이 “움직이는 도서관이었다”고 했다. 각 분야의 ‘지식사전’이었던 명사 70명과 함께 달려온 ‘동행’은 이날 오후 마지막 70번째 정류장에 도착했다. 다시 진행해달라는 요청은 많았지만 예정대로 일단 멈춤!

< 시리즈 끝 >

[명사 70인과의 동행] (70) 천년 요새 온달성·고구려사 새긴 중원비…“동행, 역사 답사 넘어 미래 설정하는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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