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퍼스트레이디’ 육영수

2014.01.24 19:32 입력 2014.01.24 21:50 수정
천정환 | 성균관대 국문학과 교수

박정희의 냉혹함 보완한 ‘목련꽃 이미지’

현재 한국 대통령은 여성이다. ‘박근혜’라는 미혼의 자연인은 젠더로서의 ‘여성성’이 다가(多價)적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이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한국 가부장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그리고 여성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궁금하다. 아직 그가 ‘여성’으로서 발하는 (젠더적) 영향력은 거의 없는 듯하다. 한복이 새 패션코드가 됐다는 소식도 없다.

박근혜 후보가 지난 대선에서 51.6%의 득표율로 당선된 데에는, 국정원과 군의 성실한 몇몇 공무원들의 ‘개인적’ 여론조작 활동 외에도 50~70대 여성들의 몰표가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한다. 그들은 못된 며느리(?)를 연상시키는 이정희가 미워서, 또는 ‘엄마아빠 없이 자란 근혜가 불쌍해서’ 같은, 도저히 합리적인 정치적 선택의 근거로는 보기 어려운 이유를 대며 거의 ‘조직적으로’ 몰표를 던졌다 한다. 이정희 후보는 대선 후보 토론에서 ‘재수 없는’ 말빨과 총기(?) 넘치는 눈빛으로 박근혜 후보를 철저히 짓밟았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그것은 시종 ‘버벅거린’ 박 후보의 득표에 도움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 세론이었다. 그런데 계급마저 초월한 그들의 ‘묻지마 투표’에는 남성중심사회나 젊은 세대에 대한 분노뿐 아니라 여성의 권리를 향한 열망 같은 것들도 포함돼 있었을 것이다. 이들의 대부분은 산업화와 민주화의 과정에서 소외되고 희생한 세대들이다.

육영수 여사가 1969년 한 양말공장 준공식에 참석해 공장 노동자의 설명을 듣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육영수 여사가 1969년 한 양말공장 준공식에 참석해 공장 노동자의 설명을 듣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영부인’ 활동도 정치임을 보여주다

박근혜가 가진 정치적 자원 중 가장 유력한 것은 물론 ‘박정희 신화’지만, ‘여성 대통령’으로서 박근혜가 가진 정치적 자원 중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분명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과 ‘육영수 코드’일 것이다. 박정희야 언제나 증오와 저주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누구도 육영수를 미워하거나 폄하하기 어렵다.

여기서 꽤 어려운 질문과 마주쳐야 한다. ‘영부인’의 면모나 활동 따위가 과연 해당 정권의 통치성 중 일부가 될 수 있나? 그럴 수도 있음을 보여준 것이 바로 육영수와 그녀가 남긴 것이 아닌가.

결론부터 미리 말하는 셈이 되겠는데 육영수는 박정희식 정치의 냉혹함과 촌스러움을 그 특유의 자애로움과 우아함(또는 그런 이미지)으로 어루만지거나 무마하는, 그리하여 박정희 레짐의 국민주의를 다른 차원에서 구현하는 주체 역할을 했다. 그 이미지는 특히 신사임당 같은 봉건적·역사적 인물과 겹쳤지만(또는 그렇게 조장했지만) 육영수의 역할은 단지 ‘현모양처’ 이상이었다. 아직 이에 대한 연구나 논의는 별로 없다.

육영수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진정한(?) ‘퍼스트레이디’이자 ‘국모’(이런 봉건적인 용어를 인용해야 함을 용서 바란다)로서 박정희 정치를 보족(補足)했다. 육영수의 전임자인 프란체스카와 공덕귀는 매우 제한된 역할만을 수행했을 뿐, 국모 자격은 없었다. 프란체스카는 기본적으로 파란 눈의 외국인이었고 못난 독재자 남편과 함께 비루하게 하와이로 달아나야 했다. 공덕귀 여사는 퍼스트레이디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여유 자체가 없었다.

후임자들과 비교해도 퍼스트레이디로서 육영수는 독보적이다. 예컨대 전두환의 ‘안사람’이며 ‘이대 나온 여자’(중퇴)였던 이순자 여사가 어린이와 심장병 환자들을 위해 나름 애쓴 공로가 없지 않음에도 절대다수 국민들에게 받은 조롱과 미움을 생각해보라. 실제 한국행정학회가 조사한 한 자료에 따르면, 역대 퍼스트레이디에 대한 국민들의 평가는 육영수 여사만 긍정적으로 나타났다 한다.

■ 비극적 죽음으로 완성된 이미지

육영수는 1950년 한국전쟁 중 부산에 피란 중일 때 전처소생이 있는 육군 중령 박정희와 결혼했다. 퍼스트레이디가 된 이후 육영수의 활동폭은 넓었다. 세상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게 만든 육영수의 면모는 대략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여성·장애인·아동 등 소외된 자들과 사회적 약자를 위해 벌인 봉사활동이다. 알려진 대로 육영수는 양지회 같은 단체를 통해 소외되고 가난한 여성이나 장애인을 도왔으며 자주 고아원·양로원을 방문·위문하고 복지정책에 관여해 어린이회관·어린이대공원을 만들고 정신지체 아동을 위한 사회사업도 벌였다. 특히 육영수의 ‘봉사 신화’가 만들어진 데는 한센병 환자를 도운 일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듯하다. 육영수는 1971년부터 본격적으로 한센병 환자 복지사업에 나섰다. 그중에서 가장 크게 대중의 이목을 끈 일은 1971년 12월18일 유명한 한센 시인 한하운이 수행하는 가운데 전남 나주의 한센인촌을 방문하고, 이어 1972년 9월3일에도 전북 익산의 한센인촌을 방문한 것이다. 또한 틈틈이 한센인촌에 약품과 종돈 등 구호물자를 ‘하사’했으며, 1973년 10월2일에는 소록도 한센병 환자 자녀들을 청와대에 불러 접견하고 다과를 베풀었다. 한센병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 사회적 배제가 여전하던 시절, 직접 환자와 접촉하고 사회적 인식을 다르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육영수의 공로는 크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1974년 서거 직후에 전국에 산재한 한센병 환자들이 소록도 등에 육 여사 공덕비를 세웠다. 아마 이런 사정들 때문에 육영수가 소록도 한센인촌을 방문해 일일이 환자들 손을 잡아주었다는 신화도 만들어진 모양이다. 그러나 이는 없는 사실이다. 육 여사는 소록도를 방문한 적이 없다. 2000년 5월 역대 대통령 부인 중 처음으로 소록도를 찾아간 사람은 김대중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였다. 이 사실은 국립소록도병원사에도 뚜렷이 기록돼 있다.

둘째, 육영수가 여성으로서 겪은 고난이다. 이는 특히 거칠고 독한 유신의 시대상과 박정희식 정치에서 비롯되는 바다. 정확한 사실을 확인하기는 어렵지만(주로 육영수 자신의 인터뷰에서 비롯된 것임) 육영수는 재야와 일반사회의 여론을 들어 박 대통령에게 직언과 건의를 마다하지 않는 ‘청와대 안의 야당’이었다 한다. 그리고 더 중요한 점은 남편 박정희의 사생활이다. 박정희는 상당히 시끄러운 여성편력의 주체였고 육영수 생전에도 말썽을 일으켰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육박전’을 벌여 박정희에게 맞았다는 둥 소문의 주인공으로서 육영수는 못된 가부장에게 수난당하는 여성이자 조강지처로서의 대중적 이미지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셋째, 그녀의 비극적인 죽음이 그녀의 이미지를 완성했다. 이런 면은 1974년 8월15일 박정희 저격사건에서 육영수가 결국 남편인 박정희 대신 희생된 격이어서 더욱 증폭됐다. 아직 젊고 우아했던 그녀가 총탄에 갑자기 서거함으로써 그 죽음은 진정 비극적이고 애처로운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목련꽃’이라는 이미지도 이렇게 부여된 것일 테다. 8월19일에 열린 국민장이야말로 유신의 역사에서 가장 기억할 만한, 아니 대한민국 현대사에서도 가장 드라마틱한 한 장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무수한 대중과 특히 많은 여성들이 육영수와 박정희의 가족들을 위해 눈물을 흘린 이날, 박정희식 파시즘적 통치와 반공개발주의는 다른 함의와 후과를 갖게 된 것이다.

■ 박근혜 대통령에 남긴 ‘상반된 후광’

육영수는 좋은 의미에서 오지랖이 상당히 넓었던 듯하다. 그녀의 손길은 전태일을 배출하고 1970~1980년대 가장 대표적인 민주노조운동의 산실이 된 청계피복노조에까지 뻗었다. 1973년 육영수는 청계피복 노동자들의 실태에 대해 듣고, 노동자들이 전태일의 뜻을 받들어 노동교실을 설립하자 이를 적극 챙겨 지원했다. 그러나 육영수 사후 1977년 박정희의 공권력은 바로 이 노동교실을 마구 짓밟고 노동자들을 감옥에 처넣었다. 이 에피소드는 상징적이다. 육영수의 온정주의와 박정희의 잔인무도한 노동정책과 통치성이 선명하게 대비되지 않는가?

박근혜 대통령은 흥미롭게도 대통령과 퍼스트레이디를 겸하고 있는 셈이다. 부모 양쪽으로부터의 후광을 다 물려받은 그녀의 통치는 잔혹하고 공포스러웠던 아버지 쪽에 기울게 될까, 아니면 자애롭고 따뜻했던 어머니 쪽으로 흐를까? 물론 어느 쪽도 바람직하지는 않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불통과 복고 이외에 박근혜 대통령이 새로 보여준 긍정적인 리더십이나 ‘대통령 문화’는 없다. 이제 겨우 1년이 지났을 뿐인데 사람들은 마치 유신시절 몇 년을 보낸 것처럼 답답해하고 있다. 어머니 육영수의 민주적이고 ‘목련꽃’ 같은 이미지는 단지 외양 때문에 얻어진 것만은 아니다. 전태일과 청계피복노조의 후예라 할 만한 민주노총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지금 박 대통령 앞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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