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은 언제 폭력이 되는가?

2020.12.15 03:00 입력 2020.12.15 03:03 수정

[장대익 칼럼]공감은 언제 폭력이 되는가?

“다 그렇게 구명 조끼를, 학생들은 입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발견하기가 힘듭니까?” 2014년 4월16일, 박근혜 전 대통령이 온 국민 앞에서 던진 첫마디였다. 세월호가 침몰하기 시작한 지 무려 7시간이 지난 후였다. 상황 파악은 물론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모르고 던진 말처럼 들렸고, 전 국민이 분노하기 시작했다.

왜 분노했을까? 대통령에게서 국민의 고통에 대한 ‘공감’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만일 고통 속에 죽어가는 학생의 입장이었다면, 그 광경을 손 놓고 볼 수밖에 없던 부모의 찢어지는 심정이었다면 결코 할 수 없는(해서는 안 될)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다. 그는 그들에게 공감하지 못했었고, 이후 눈물까지 보이며 퇴진을 했지만, 우리는 그에게 공감할 수 없었다. 공감은 진심 어린 소통의 최대 변수다.

장대익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장대익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대체 공감(empathy)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상상력을 발휘해 다른 사람의 처지에 서보고, 다른 사람의 느낌과 시각을 이해하며, 그렇게 이해한 내용을 활용해 행동지침으로 삼는 기술”로 이해된다. 이 정의에 따르면 동정, 연민, 측은함은 공감이 아니다. 이런 감정들은 타인의 감정이나 입장을 이해하려는 노력 없이도 타인에 대해 느낄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동정은 타인의 상황에 대한 안타까운 감정일 뿐 타인의 처지에 대한 관점 수용을 포함하지 않는다. 즉 타인의 맥락에 대한 이해가 없다. 박 전 대통령의 세월호 발언이 기껏해야 동정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게다가 동정은 타인의 고통이나 곤경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가령 우리는 타인의 기쁨과 즐거움에 동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공감은 상상을 통해 타인이 처한 상황을 인식하고 그들의 고통뿐만 아니라 모든 감정을 함께 느끼는 상태를 말한다. 공감이 타자와 ‘함께’ 느끼는 상태라면, 공감의 유사품들은 타자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다. 우리의 촉은 이 미묘한 차이를 감지할 만큼 섬세히 진화했다.

한편 공감은 혐오와 차별의 시대를 위한 해법으로도 자주 논의된다. 특히 팬데믹의 장기화로 타자에 대한 혐오와 배제가 심화되면서 공감력을 함양하여 갈등을 완화하자는 식의 상식적 담론이 회자되고 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주의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혐오와 공감이 늘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도 이 둘의 관계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실제로 공감은 인류의 역사 속에서 갈등의 치료제였을 뿐만 아니라 증폭제로도 작용했다.

2004년 4월28일, 이라크 아부그라이브 교도소에서 촬영된 몇 장의 사진 속엔 벌거벗겨진 채 차곡차곡 쌓여있는 이라크 포로들 옆에서 환히 웃고 있는 미군들이 있었다. 심지어 포로의 목에 끈을 묶어 질질 끌고 다니는 모습도 담겼다. 이런 변태적 사진이 전 세계 언론에 뿌려지자 미군 가해자들이 군법회의에 회부되었고 결국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 후 가해자들에 대한 심리 조사의 결과는 또 한번 충격이었다. 그들은 괴물이 아니라 그저 평범한 시민이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타자에 대한 공감 제로인 사이코패스라기보다는 자기 집단에 대해 과잉 공감을 보인 보통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기 동료들을 해한 이라크 군인들을 비인간화함으로써 자기 집단의 분노에 극도로 공감했던 것이다.

공감은 마일리지 같은 것이어서 누군가에게 쓰면 다른 이들에게는 줄 수 없다. 내집단(in-group)에 강하게 공감했다면 그만큼 외집단(out-group)에 공감할 여유가 소멸된다. 심지어 내집단에 대한 공감이 외집단에 대한 처벌로 이어진다는 심리 연구도 있다. 피험자들에게 미국에서 벌어진 아동 학대 사건과 중동에서 벌어진 저널리스트 납치 사건에 대해 읽게 했다. 그런 다음 어떻게 대응하는 게 가장 좋을지를 물었다. 가령 납치 사건의 경우 무대응 원칙부터 공개적 비판 성명 공개, 그리고 무력 보복까지 여러 정치적 선택지를 제시했다. 그런 후 공감척도를 활용해 피험자들의 공감능력을 검사했다. 실험 결과는 공감능력이 높은 사람일수록 가해자에 대해 더 가혹한 처벌을 원한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공감 호르몬이라고 불리는 옥시토신에 대한 연구도 비슷한 결과를 내놓고 있다. 옥시토신 수치가 높을수록 우리 편에 대한 충성심은 높아지지만 상대편에 대한 공감은 오히려 낮아진다.

이렇게 공감의 깊이와 반경은 상충한다. 미국 남부 흑인들이 경험했던 혐오, 차별, 폭력이나 유럽의 홀로코스트 잔학 행위들은 단순히 가해자의 공감 결핍으로만 이해될 수 없다. 그 가해자들은 흑인 남성에게 강간당한 백인 여성이나 유태인 소아성애자에게 착취당한 독일 아이들의 고통에 관한 이야기에 극도로 공감한 이들이었다. 신의 이름으로 거룩한 학살을 자행했던 십자군이나 최근 이슬람 테러조직의 문제는 공감 결핍이 아니라 자기 집단에 대한 공감 과잉이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일제강점, 제주 4·3사건 등의 한국 근현대사도 내집단에 대한 과잉 공감이 만들어낸 질곡의 역사로 이해될 수 있다.

최근 T&C재단의 기획으로 큰 울림을 주고 있는 ‘너와 내가 만든 세상’ 전시회는 이 과잉 공감의 비극을 ‘선택적 공감’이라는 키워드로 예리하게 포착했다. 그리고 “역사 속 수많은 학살과 혐오범죄 뒤에 예외없이 주리를 틀고 있는, 자신의 분노에 대한 합리화 목소리가 어떻게 군중의 불안을 먹이 삼아 자라났는지”를 먹먹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과거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모든 갈등과 혼란을 보라. 그것은 선택적 과잉 공감이 빚어낸 것들이다.

초갈등 시대에 우리는 또다시 공감에 SOS를 친다. 하지만 한쪽에 과잉 공감하는 순간, 다른 쪽에는 폭력이 된다는 역사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치료제는 공감의 깊이가 아니라 반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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