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하다고 '모욕감'을 모르겠는가

2020.12.17 15:42 입력 2020.12.17 18:24 수정

한겨울에도 벽이 땀을 흘렸다. 결로(結露)였다. 공기 중의 습기가 차가운 기온을 만나 물방울로 맺히는 현상. 흘러내리는 물방울을 타고 곰팡이가 기어올랐다. 이원호씨가 살던 낡고 좁은 옛집의 겨울은 더 추운데 습하기까지 했다. 여름도 더 더웠다.

신혼생활만큼은 좋은 집에서 하고 싶었다. 신혼부부를 위한 공공임대주택을 노리기로 했다. 인터넷 카페를 뒤지고 수시로 공고를 확인해 지원했다. 3~4년동안 탈락하다 마침내 서울 은평구의 한 행복주택에 들어올 수 있었다. 이씨는 “그만큼밖에 안 걸린 건 행운”이라고 했다. 임대료는 옛집과 비슷한데 시설은 “비교도 안 되게” 훌륭했다. 만족하고 지내던 어느 날, 이씨 부부의 눈에 한 정치인의 발언을 전하는 뉴스가 날아와 꽂혔다.

“평생 공공임대에나 살라고? 니가 가라 공공임대.”

서울시내 영구임대아파트에서 한 할머니가 유모차를 밀며 집으로 들어서고 있다. 강윤중 기자

서울시내 영구임대아파트에서 한 할머니가 유모차를 밀며 집으로 들어서고 있다. 강윤중 기자

■“누군 지금도 들어가려 애쓰는데, 못을 박네요”

상대적으로 소득이 낮은 이들을 향한 무신경한 비하 발언이 잇따르고 있다. 임대주택 주민이 대표적인 예다. 유승민 전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 12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 정권 사람들 중에 공공임대에 살겠다는 사람은 한 명도 못봤다”며 “그래서 이런 말들이 나오는 거다. 평생 공공임대나 살라고? 니가 가라 공공임대”라고 적었다. 정부의 공공임대주택 확대 정책을 비판하며 쓴 글이었다.

유 전 의원의 발언을 두고 비판 여론이 일었다. 정책에 대한 시각차를 떠나, 지나친 발언으로 임대주택 주민들을 비하했다는 지적이다.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같은 날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지금 이 순간 그곳에 살고 있는 우리 아이들과 국민들은 뭐가 되는가. 정말 너무하신다”라고 말했다. 박 의원은 지난 14일 YTN라디오 ‘황보선의 출발 새아침’에서도 “임대주택에 사는 500만명 가까운 국민을 비하하고 모욕한 것”이라고 말했다.

유승민 전 국민의힘 의원. 연합뉴스

유승민 전 국민의힘 의원. 연합뉴스

임대주택 주민 이씨도 “실제로 공공임대 살거나, 들어가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 심정을 모르는 얘기”라며 “임대주택에 대한 낙인이나 폄하가 머릿속에 있는 것 아닌가”라고 했다. 노기덕 임대주택연합 사무총장도 “최소한의 주거에 대한 서민들의 희망을 접게 하고 못을 박는 무책임한 발언”이라고 지적했다.

임대주택 주민을 향한 차별적 시선은 오래된 이야기다. 한 임대주택 주민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유 전 의원 같은 발언은) 너무 많이 들어서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했다. 일상에서도 편견이 만연하다. 일부 초등학교에서 임대주택 아이들을 ‘휴거(임대주택 브랜드와 거지를 합친 비속어)’나 ‘빌거(빌라+거지)’라고 부른다는 사실이 언론을 통해 이슈가 됐다. 노 사무총장은 “주거는 최소한의 권리이자 삶의 1차적 문제”라며 “임대주택에 대한 편견과 편가르기를 강화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어떻게 쇄신할지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돈 없으면 아동학대? 세금 주면 ‘얼씨구나’?

‘가난 혐오’는 임대주택에서 멈추지 않는다. 최근 트위터 실시간 트렌드에 ‘아동학대’가 올랐다. 문재인 대통령과 변창흠 국토부장관 내정자가 13평 임대주택에 방문해 ‘아이 두 명도 충분하다’는 취지로 나눈 대화가 입방아에 오른 즈음이었다. 많은 네티즌이 ‘가난한 집이 아이를 낳으면 아동학대’라는 주제로 트윗을 쏟아냈다. “돈이 없으면 애를 낳지 마라. 태어난 아이는 무슨 죄냐”, “없는 살림에 애XX XX르면(낳으면) 그게 학대다”등 격한 발언이 오갔다. 일각에서는 ‘지나친 혐오 아니냐’는 반박도 제기됐다.

트위터 화면 갈무리

트위터 화면 갈무리

교육 영역에서는 차별이 더 적나라하다. 내년 3월부터 ‘마을결합혁신학교’로 전환을 앞두고 있던 서울 서초구 경원중학교는 지난 10일 혁신학교 지정을 철회했다. 혁신학교는 입시 위주 암기식 교육 대신 토론식 수업 등을 진행한다. 학부모 69.72%가 전환을 찬성했지만 일부 학부모들의 격한 반대에 부딪히면서 철회 수순을 밟게 됐다.

반대하는 학부모들은 교육당국과 학교 측의 소통이 부족했다는 점을 반대의 근거로 들었다. 하지만 서울시교육청 교육감 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청원은 다른 배경을 시사한다. 지난달 30일에 ‘경원중 혁신학교 지정 결사반대’라는 글을 올린 청원인은 “잠원지역의 최고우수 중학교인 경원중학교를 내년부터 혁신학교 지정하려는 음모를 적극 철회하라”며 “세금 몇 푼 던져주고 얼씨구나 하는 곳에 가서 혁신하라”고 적었다.

지난 7일 서울 경원중학교의 ‘마을결합혁신학교’ 추진을 둘러싸고 학부모들이 학교 앞에서 혁신학교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7일 서울 경원중학교의 ‘마을결합혁신학교’ 추진을 둘러싸고 학부모들이 학교 앞에서 혁신학교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세금 몇 푼’이 급한 낙후 지역에서나 혁신학교를 세우라는 취지의 이 청원엔 17일 현재 1만2000여명이 동의해 교육감 답변 기준(1만명)을 넘었다. 초창기 변두리 낙후 지역에 주로 들어섰던 혁신학교를 향한 편견과 강남권 학력자본에 대한 자부심(“최고우수 중학교”)이 어우러졌다. 혁신학교졸업생연대 ‘까지’는 지난 16일 “아이들의 교육보다 집값에 대한 걱정을 드러내는 부모는 ‘우리 아이가 최고야’라지만, 아이가 건강하게 사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라고 비판했다.

전문가들은 사회·경제적 배경에 따른 혐오도 중요한 사회문제로 논의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박권일 사회비평가는 “특히 한국에서 계급차별적 혐오는 너무 만연해 있지만 ‘당연시’되다 보니 오히려 성·인종 등 정체성과 관련된 혐오에 비해 많이 논의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능력이 없으니 모멸과 멸시를 받아도 당연히 감수해야 한다는 ‘능력주의’가 내면화하면서, 약자를 향한 차별과 배제를 정당화하는 발언들이 나오고 있다”며 “경제적 양극화와 불평등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해 함부로 이야기해선 안된다는 공동체의식, 윤리의식을 기를 기회가 많아져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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