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해서 그렇게 된 게 아니다” “관심병사 취급 안타까워”

2021.06.06 17:28 입력 2021.06.06 20:57 수정

‘성추행 사망’ 공군 부사관 추모소 표정

<b>거수경례로 작별인사</b> 군복을 입은 군인이 6일 경기 성남 국군수도병원에 마련된 공군 성추행 피해자 이모 중사의 분향소를 방문해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거수경례로 작별인사 군복을 입은 군인이 6일 경기 성남 국군수도병원에 마련된 공군 성추행 피해자 이모 중사의 분향소를 방문해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군 동료들 외 일면식도 없는 시민들까지 조문 발길
“7년 의무복무 상황에서 하루하루가 지옥이었을 것”
유족, 문 대통령에 “철저한 조사로 딸 명예 회복을”

“우리 함께했던 날들의 열에 하나만 기억해줄래. 우리가 아파했던 날은 모두 나 혼자 기억할게. 혹시 힘든 일이 있다면 모두 잊어줘….”

6일 오후 경기 성남시 국군수도병원에 마련된 이모 중사의 분향소(추모소)에 인디밴드 ‘브로콜리너마저’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고인이 생전 즐겨 듣던 노래라고 했다. 영정 아래에는 고교 졸업생 시절, 하사 임관 시절 등 그의 생전 사진들과 이를 지켜보는 고양이 인형들이 놓여 있었다. 스무 송이 국화 사이 중앙에는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로 시작하는 성경 시편 23편이 펼쳐져 있었다.

이 중사의 분향소에는 이날 오후 이 중사의 친지, 그와 함께 근무했던 동료들은 물론 일면식도 없는 시민들까지 조문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유족들은 고인의 사망 경위가 밝혀지기 전까지 장례를 치를 수 없다며 지난 4일 밤 빈소 대신 분향소를 설치했다. 이 중사의 동갑내기 친척 A씨는 “만나는 사람마다 ‘어른스럽고 배려심 깊다’고 말할 만큼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며 “(그가) 약해서 그렇게 된 게 아니다. 살고자 하는 의지가 누구보다 강했다”면서 울먹였다.

이 중사와 함께 근무했던 동료들도 분향소를 찾았다. 공군 제20전투비행단 레이더정비반에서 2018년 하반기부터 지난해까지 이 중사와 함께 근무했다는 이주호씨(24)와 이도형씨(29)는 이 중사를 “성실하게 남의 일까지 도맡아 했던 사람”으로 기억했다. 이도형씨는 “그런 분이 (성추행 사건) 신고 이후 ‘관심병사’ 취급을 당했다고 해 너무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이 중사 고교 동문의 어머니 B씨도 분향소를 찾아 눈물을 훔쳤다. B씨는 “이번 사건 기사 댓글에 ‘그렇게 힘들면 그만두지 그랬냐’는 반응이 있는데 7년 동안 의무복무를 해야 하는 상황을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말했다. 이 중사는 경남 사천의 공군 항공과학고등학교 졸업생으로 군 필수 기술 분야 장기복무 부사관은 군인사법에 따라 최소 7년을 복무한 후 전역을 지원할 수 있다. B씨는 “그만둘 수 없는 상황에서 1분1초, 하루하루가 지옥이었을 것”이라면서 “이제라도 본인은 명예회복을 하고 다른 여군들도 안전하게 복무할 수 있도록 세상이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서울 은평구에 거주하는 박정훈씨(47)는 “나라도 와 국화꽃을 놓으면 (이 중사의) 억울하고 슬픈 마음에 위로가 되지 않을까 해서 왔다”고 말했다. 한 시민은 방명록에 “자랑스러운 국가의 딸 이 중사님 편안히 잠드소서. 일반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이 중사의 죽음이 가슴 아파서 찾아왔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이 중사는 지난 3월 선임 부사관인 장모 중사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신고한 후 두 달여 만인 지난달 22일 관사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군 수사기관의 초동수사가 부실했으며, 군 관계자들이 조직적으로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피해자 등을 회유·압박한 정황이 드러났다.

문 대통령은 이날 오전 분향소를 방문해 약 10분간 유가족을 만났다. 박경미 청와대 대변인은 문 대통령이 이 중사의 부모에게 “얼마나 애통하시냐”며 “국가가 지켜주지 못해 죄송하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 중사의 아버지는 “딸의 한을 풀고 명예를 회복시켜달라”고, 어머니는 “철저하게 조사해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문 대통령은 동행한 서욱 국방부 장관에게 “철저한 조사뿐 아니라 이번 일을 계기로 병영문화가 달라지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정치권에서는 더불어민주당 윤호중 원내대표와 김용민·백혜련·김영배 최고위원, 국민의힘 하태경·신원식 의원, 정의당 여영국 원내대표 등이 참배했다. 유족들은 분향소 앞에 “고인의 죽음을 이용한 모든 정치적 행동이나 의사표시를 반대한다” “순수한 추모의 마음과 조문만 감사히 받고 부의금은 정중히 사양한다”는 내용을 담은 안내문을 설치했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