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월드컵에 묻힌 것들

2002.06.25 23:49

<여인철/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 부위원장>

지금 나에게 월드컵보다 더 큰 해일로 밀려오는 것이 있다. 우선 지난 13일 경기 양주군에서 미군 탱크에 치여 죽은 우리 두 여중생의 모습이다. 그 엄청난 비극적 사고가 지금 월드컵 바람에 묻혀 있다. 미군측은 ‘과실치사’로 발표하며 서둘러 덮으려 하지만 그렇게 덮을 수는 없는 일이다. 유족측은 ‘살인행위’라고 주장하고 있다. 설사 ‘과실치사’라 해도 무엇이 ‘과실’이고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밝혀져야 한다. 미군의 고압선에 감전돼 사지가 잘린 채 투병생활을 하던 전동록씨가 사망하여 장례를 치른 지 3일 만에 또다시 미군에 의해 발생한 사고다. 이대로 두었다간 우리 이웃 누구에게 무슨 화가 또 닥칠지 모를 일이다.

새삼스레 나를 분노하게 만드는 것은 미군이 공무수행 중 발생한 사고라며 일방적으로 조사하고 끝내려 한다는 것과 우리가 재판관할권조차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 때문이라 하니 그 협정은 누가 만들었는지 궁금하다. 더욱 기막힌 일은 이 사고에 대해 항의하러 간 우리 여고생들과 시민단체에게 무릎을 꿇고 사죄해도 시원찮을 미군이 무장한 채 총부리를 들이댔다는 것이다. 미군의 오만방자함이 하늘을 찌를 듯하다.

뿐만 아니다. 미국은 지금 우리의 옛 덕수궁 터에 그들의 숙소를 지으려 하고 있다. 용산 미군기지 내에 그들의 아파트를 짓겠다고 하여 우리의 국민적 저항을 받은 것이 바로 얼마전 일이다. 미국은 이 나라의 주인인 우리를 무엇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남의 나라에 들어와 그 나라의 고궁 터에 숙소를 지으려는 그들의 발상을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중국은 우리 대사관에 침범하여 외교관을 폭행하는 주권침해 행위를 저지르고도 전면 부인하는 오만을 저질렀다. 우리를 우습게 보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월드컵 개막 전에서 발생한 공석사태에 대해 블라터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은 사과는커녕 이래저래 우리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있다. 일본은 장관까지 나서서 사과를 받아냈지만, 우리는 누가 문제 제기를 했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 이 모든 것들이 월드컵이란 이름으로 묻혀져도 괜찮은 것인가.

누구나 붉은 티를 입고 거리로 나오기는 쉽다. 그렇게 함으로써 애국자 대열에 합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군의 총 앞에서 옆의 친구가 죽어나가는 것을 보면서도 끊임없이 새총으로나마 저항하는 팔레스타인 젊은이의 진한 애국심처럼 우리 국민의 붉은 함성은 그런 상황에서도 타올라야 그 애국심을 진정한 애국심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과 ‘오, 필승 코리아’를 외치며 온 국민이 환호작약하는 이 순간에도 미국의 선제공격론으로 인한 어두운 그림자는 한반도를 뒤덮고 있고, 우리의 국민적 자존심은 신음하고 있다. 우리가 이런 부당하고 어처구니없는 일을 수없이 당하고도 항의할 생각조차 못하고 저자세로 일관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경이스러운 일이다. 무시당하고 사는데 이골이 났는지, 웬만한 푸대접과 무시에는 낯도 찌푸리지 않는다. 왜 우리는 분노해야 할 때 침묵을 지키고, 우리보다 강한 것에 비굴하고 약한 것 위에 군림하려 할까.

이제부터 우리는 SOFA가 우리의 삶과 민족적 자존심을 어떻게 옥죄고 있는지 공부를 시작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의무이며 상식이 되어야 한다. 그것으로부터 우리가 자존심을 지키는 문화국민일 수 있고 우리나라를 주권국가라 부를 수 있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업신여기는 모든 부당한 것에 대해 당당히 항의할 줄 알아야 한다.

세계인의 존경이 그냥 침묵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자존심을 지키려 노력하지 않는 나라의 국민에게 이 냉혹한 세계에서 돌아올 것은 조롱뿐이다. 버려야 할 우리의 ‘버릇’을 저 월드컵 열풍에 날려버리자. 대전 월드컵 경기장이 내려다보이는 산에서 간절히 소망한다. 그리고 피어보지도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 두 여중생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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