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건국대 ‘애학투’ 사건

2004.11.21 17:45

1986년10월28일 오전 8시쯤. 건국대 교정은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등교하는 학생들로 붐볐다. 국화 전시회 기간(국화는 건국대의 브랜드로 정평이 나 있다) 중이었다. 본관과 그 주변은 황국을 주종으로 더러 붉게 타오르는 듯한 국화가 늦가을의 정취를 짙게 풍겼다.

교정 중심인 황소상 주변에서 일행인 듯 보이는 동아리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게 평소와 다소 다른 모습이었다. 역시 또다른 일행인 듯한 여학생들이 구내식당으로 대거 모여들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들은 사실 건국대생이 아니었다. 서울지역의 다른 대학교 학생들이었다.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한 학교측은 9시쯤에야 급히 경찰에 경계병력을 요청했다.

[실록민주화운동] 78. 건국대  ‘애학투’ 사건

경찰은 전국의 대학생들이 이날 건국대에 모여 ‘전국 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애학투)’ 발족식을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상당수 건국대생들은 집회의 성격이나 내용을 알지 못했다. 건국대 총학생회 실무자들이 준비에 골몰하느라 홍보를 제대로 하지 못한 탓이었다.

오후 1시, 민주광장에 29개 대학 2,000여명이 모인 가운데 발족식이 시작됐다. 행사 후반 들어 전두환 5공정권을 지원하는 외세를 규탄한다며 미국 대통령 레이건과 일본 총리 나카소네에 대한 화형식을 진행할 무렵이었다.

이때 공대 건물을 지나 학생회관까지 진입한 경찰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자기 최루탄을 무차별 난사하기 시작했다. 광장은 순식간에 먼지 구름 같은 최루 연기에 휩싸였다. 직격탄을 맞은 부상자를 업고 교직원과 교수들이 정문으로 내달렸다. 집회 참가자들은 최루탄을 피해 건물 안으로 쫓겨 들어갔다. 본관, 중앙도서관, 학생회관, 사회과학관 등으로 피신한 학생들은 경찰의 진입을 막고자 출입구에 캐비닛·책상·의자 등으로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한숨을 돌렸다.

그러나 이도 잠시에 불과했다. 경찰은 건물 안을 향해 최루탄을 대거 발사했다. 실내는 최루가스로 가득 찼다. 학생들은 환기를 위해 궁여지책으로 유리창을 모두 부셨다. 교정은 삽시간에 아수라 지옥으로 변했다.

해가 지면서 찬바람이 엄습하면서 기온이 뚝 떨어졌다. 학교는 경찰에 병력 철수를, 학생들에게는 안전 귀가를 전제로 자진 해산을 제의했다. 그러나 경찰은 학교측 제의를 묵살했다. 오히려 오후 7시가 지나면서 전경차는 70대로, 경찰병력은 2,000여명으로 불어나 건국대를 물샐 틈없이 포위했다.

집회 참가자뿐만이 아니었다. 도서관에 있던 건국대생도, 친구를 만나러 온 타교생도 투망 속에 갇힌 물고기 신세로 전락했다. 본의 아니게 학생들은 점거농성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아무런 준비없이 건물 안에 갇힌 이들은 첫날 밤을 극도의 공포 속에서 지샜다.

이틀째인 10월29일 휴교에 들어간 건국대는 총장을 비롯해 간부들이 나서 경찰에 학생들의 안전귀가 협상을 시도했으나 허사였다. 일개 대학 따위의 성의쯤이야 간단히 묵살해도 좋다는 듯, 경찰은 오전 단수에 이어 오후에는 전기까지 끊었다. 학생들은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다. 밤에는 극심한 갈증과 추위에 떨어야 했다. 뉴스를 보고 달려온 학부모들이 건물 밖에서 외투를 전달하려고 경찰에 애원하는 모습이 곳곳에서 보였다. 이를 지켜본 학생들은 ‘어머니의 노래’를 함께 부르면서 부둥켜 안았다.

학교 근방 화양리 일대에는 성능 좋은 마이크를 장착한 정체불명의 차량들이 “공산당은 반드시 망한다”고 방송하면서 거리를 휘젓고 다녔다. 그러자 극심한 피로와 허기에 지친 와중에도 사회과학관의 한 여학생이 밖을 향해 손나팔을 만들어 “애국시민 여러분, 우리는 빨갱이가 아닙니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꿈꾸는 애국학생들입니다”라고 외쳤다. 주변 건물의 옥상에 있던 주민들이 박수를 보내고 격려했다.

서울의 여러 대학에는 애학투의 건국대 농성에 대한 지지 대자보가 붙었지만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이를 한데 모을 역량이 없었다. 각 대학 투쟁본부가 이미 건국대에 갇혔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추위와 누적된 피로, 타는 듯한 갈증과 굶주림 속에서 10월31일 아침을 맞았다. 오전 8시30분, 8,500여명의 경찰병력이 진압작전에 돌입했다. 무장 헬기가 굉음과 함께 건국대 상공을 선회하면서 적을 공격하듯 소이탄을 토하는 것을 신호로 경찰들은 일제히 다섯 개 건물 안으로 돌격해 들어갔다. 무서운 속도로 내려꽂히는 소이탄과 최루탄, 적의를 번득이며 어지럽게 날아다니는 쇠파이프 등 건국대 교정은 생지옥이었다.

혹시 있을지도 모를 투신에 대비해 건물 주변에 깔아놓은 매트리스에 불이 붙으면서 검은 연기가 불길과 함께 치솟았다. 건물 안쪽에서는 “사람이 죽어간다” “구급차를 불러주세요”가 난무했다. 거친 비명으로 가득했다. 운동장 스탠드와 정문 밖에서 진압작전을 지켜보던 학부모들까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고가사다리에서 소방 호스로 퍼부어대는 최루액을 잔뜩 뒤집어쓴 학생들이 거의 실신 상태로 끌려나왔다. 지칠대로 지친 학생들은 끌려나오면서 잔혹한 발길질 세례를 받아야 했다. 경찰은 도서관, 학생관, 교양학관, 본관, 사회과학관 차례로 진압작전을 완료했다. 주동자급 체포에는 1백만원 상금과 포상 휴가까지 걸려 있는 작전이었다.

진압이 끝난 뒤 경찰은 대운동장에 55개 중대 병력을 집결시켰다. 마치 적을 섬멸한 뒤 전공을 자축하기라도 하듯, 의기양양한 모습을 감추지 않았다.

관제언론은 전장에서 상처를 입은 학생들을 향해 연일 공산혁명분자라고 매도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검찰은 연행자 1,525명 중 부상자 등을 제외한 1,290명을 구속했다. 그중 주동자 29명에게는 국가보안법이 적용됐다. 근대적 사법체계가 출범한 뒤 단일 사건으로는 세계 최고의 기록이었다.

애학투는 ‘반제 민중민주화운동의 횃불을 들고 민족해방의 기수로 부활하자’는 슬로건 아래 86년 봄의 대학생 전방입소 훈련 거부와 팀스피리트 반대 투쟁에 주력하던 학생운동 그룹(민족해방파)이 만든 조직이었다. 이들은 5·3 인천사태가 대중의 신뢰를 잃으면서 민주화운동 조직의 궤멸적 탄압을 불러온 점을 반성했다. 대신 직선제 개헌을 매개로 제도권 야당과의 연합전선을 구축해 군사정권을 향해 대대적 투쟁에 돌입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또 당시 논란이 된 88올림픽은 남과 북이 공동으로 개최해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다.

사태가 종료된 뒤 공안당국이 학생운동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일부러 사상 유례없는 투망작전을 벌였다는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나돌았다. 사건을 둘러싼 여러 정황을 볼 때 개연성이 매우 높았다. 미 국무부 차관보가 갑작스럽게 방한한 것이라든지, 김대중이 대통령 불출마를 선언한 것도 정권측이 모종의 비상조치를 내릴 것이라는 소문과 함께 온갖 추측을 불러일으켰다.

더욱 희한한 일은 사건 직후에 일어났다. 북한 금강산댐에 관한 언론 보도가 그것이었다. 북한이 만성적인 전력난을 해소하기 위해 금강산댐을 건설하겠다고 발표한 것은 그해 4월이었다. 이때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러나 건국대 사건 뒤 갑자기 이 소식이 언론을 타기 시작했다. 북한이 88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해 금강산댐 물을 방류하면 여의도 63빌딩의 절반 높이까지 물에 잠기는 등 원폭 투하 이상의 피해를 입힌다는 내용이었다. 국민들은 공포에 떨어야 했다.

방송은 인기 연예인까지 동원해 금강산댐에 맞서려면 평화의 댐을 우리 손으로 건설해야 한다며 연일 선전선동에 나섰다. 결국 코흘리개들의 돼지저금통까지 훑어내 7백여억원의 성금을 걷는 데 성공했다.

이 광기는 7년이 지난 93년 감사원 감사에서 국민 사기극으로 드러났다. 개헌정국을 어떻게든 벗어나 보려는 전두환과 그 추종자들이 벌인 후안무치한 조작극이었다. 이 미완의 평화의 댐은 지금도 수려한 강원도의 경관을 욕보이듯, 거대한 입을 벌린채 흉물스럽게 방치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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