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표라는 작곡가의 말을 자신의 말로 표현하는…연주는 ‘첨언’이다

2024.04.24 20:13 입력 2024.04.24 20:14 수정

⑨ 클래식 연주회

연주에 몰입한 연주자들, 저마다의 악기로 들려주는 이야기 아름답지만 그 언어는 보통 사람이 이해하기 어려운 방언이다. 한성우 제공

연주에 몰입한 연주자들, 저마다의 악기로 들려주는 이야기 아름답지만 그 언어는 보통 사람이 이해하기 어려운 방언이다. 한성우 제공

관현악단 ‘화담앙상블’ 창단 공연
연주자 눈짓 대화, 관객 몸짓 반응
공연장 안은 철저한 ‘무언’의 시간
악기를 통해 쉼없이 첨언 또 ‘첨언’
그것이 먼 ‘방언’ 같은 관객에게
음악의 언어는 어렵기만 할 것

관람 후 식당에서 이어진 ‘형언’
누군가 말했다 “형언 못할 감동”

음악은 언어다. 작곡가는 자신의 상상력 속에 있는 이야기를 악보에 옮겨놓고 지휘자와 연주자들은 그것을 이해해 자신의 이야기로 다시 표현한다. 음표는 물론 각종 악상기호로 구체화된 이야기를 알아보고 악기로 표현해내니 그들 사이에서 음악은 언어다. 그러나 음악은 이들만의 특별한 방언일 뿐이다. 소리와 의미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진짜 언어만 아는 이들에게 음악, 특히 기악곡이 주류인 음악은 뜻을 알 수 없는 소리에 불과하다. 가사가 직접 다가오는 ‘대중음악’과 ‘클래식’이 바로 이 지점에서 호불호가 갈린다.

‘화담(和談)’과 ‘앙상블(ensemble)’, 앞의 말은 화해하는 말 또는 정답게 주고받는 말을 뜻하고 뒤의 말은 전체적인 어울림이나 통일에서 출발해 적은 인원으로 연주하는 합주단을 뜻한다. 관악기와 현악기 연주자 9명으로 ‘화담앙상블’을 구성해 창단 연주를 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어려워서 멀리한 음악과 화해할 수 있을, 나아가 그들의 언어로 정답게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작곡을 전공하고 조금 다른 현업에 있는 이, 평생 말로 먹고살던 아나운서, 늦은 나이에 뮤지컬과 집필에 심취한 작가, 그리고 은퇴 후 영원한 ‘로망’이었던 첼로를 배우기 시작한 초보 연주자와 화담을 시도해본다.

무언(無言), 말 없는 노래

잠시 후 연주가 시작되니 잡담 그만하고 빨리 들어가라는, 들어가서는 휴대전화를 끄라는, 연주 중에는 사진도 찍지 말고 떠들지 말라는 꼬장꼬장한 안내가 들려온다. 객석의 불이 꺼지고 연주자들이 등장해 오보에 주자가 ‘라(A)’ 음을 불면 이후로는 오로지 이 음에 맞지 않는 소리는 내지 못한다. 철저한 무언의 시간이지만 또 다른 언어가 시작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연주자들끼리는 눈짓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관객들은 몸짓으로 화답한다. 옆에 앉은 작곡 전공자는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무언의 언어로 곡과 연주를 설명하고 음악의 언어가 먼 방언인 이들은 눈짓으로 이해한 척한다.

‘무언가(無言歌, Lieder ohne Worte)’는 지독한 형용모순이다. 멘델스존은 피아노 독주곡을 작곡한 후 왜 이런 제목을 붙였을까? 피아노곡이니 가사가 없는 것은 당연하지만 가곡과 비슷한 선율이어서 그런 것일까? 멘델스존의 의도 혹은 이 장르의 의미와 관계없이 모든 기악곡이 무언가이다. 소리이되 말이 없으니 소리만 들어 느끼고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느낌과 이해는 말로 표현되어야만 소통이 가능하니 모순의 무한루프에 빠질 수밖에 없다.

첫 연주곡은 베토벤의 WoO 8 ‘오케스트라를 위한 12개의 독일 춤곡’인데 낯설고 재미없다. ‘무언가(LoW)’와 단어구성이 비슷한 ‘WoO(Werke ohne Opuszahl)’는 작품번호가 없는 작품이다. 베토벤의 초기 작품으로서 잘 알려지지 않은 곡인 데다 오케스트라 편성이 아닌 현악 네 명, 관악 다섯 명이 연주하니 더 낯설다. 이럴 때를 위해 연주자들은 ‘화담’을 준비해놓았다. 저마다의 손에 들려있는 ‘프로그램’과 그 안에 담겨 있는 ‘연주 노트’이다. 연주자의 멋진 사진이나 화려한 경력은 관객이 산 표의 가격을 정당화하는 것일 뿐, 연주의 가치를 높이는 것은 곡에 대한 설명과 그 곡에 대한 연주자의 해석이다.

악보는 하나인데 연주는 무한일 수밖에 없는 이유 또한 ‘무언’에 있다. 악보에 작곡가가 남긴 것은 곡의 빠르기와 느낌을 전달하는 말과 음표가 전부이다. 그러나 그 곡이 만들어진 배경, 작곡가의 설명, 후대의 일화 등이 빼곡하게 기록되어 있다. 연주자는 그 곡을 왜 선택했는지, 어떤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어떻게 표현하고 싶은가에 대해 적어 놓는다. 이렇게 노력하는 연주자와 화담하기 위해서는 이 정도는 읽고 이해해야 하고 그래야 연주자와 말을 나누지 않더라도 무언가 정답게 나눌 수 있다.

연주자와 청중의 소통을 돕는 프로그램과 연주노트, 연주회장의 불이 밝을 때 꼼꼼하게 읽어두면 음악이 이야기로 들린다. 한성우 제공

연주자와 청중의 소통을 돕는 프로그램과 연주노트, 연주회장의 불이 밝을 때 꼼꼼하게 읽어두면 음악이 이야기로 들린다. 한성우 제공

형언(形言), 말로 그리는 소리

잠깐의 쉬는 시간 뒤에 이어지는 두 번째 곡은 너무나도 익숙한 베토벤 교향곡 3번 ‘영웅’이다. 오케스트라 대형으로 자리를 잡고 앉은 9명이 펼쳐내는 소리가 점차 익숙해지더니 어느 순간 90명의 오케스트라 단원이 내는 소리로 들린다. 곡을 이끌어가느라 쉴 새 없이 바쁜 바이올린, 제2 바이올린의 빈자리와 비올라 본연의 역할을 모두 감당하느라 잠시도 긴장을 풀지 못하는 비올라, 홀 전체를 채우는 더블베이스와 함께 저음을 담당하며 때로는 다른 현악기 사이를 오르내리는 첼로의 소리가 꽉 차게 들린다. ‘9명이 혼신의 힘을 다해 90명의 소리를 만들어내겠다’고 약속한 앙상블 대표의 오보에 소리 또한 플루트, 클라리넷, 바순, 호른과 어우러지며 곡을 완성해낸다.

음악에 무관심한 이들에게 네 종류의 현악기는 그저 바이올린, 아주 조금 큰 바이올린(비올라), 큰 바이올린(첼로), 엄청 큰 바이올린(더블베이스)일 뿐이다. 플루트는 반짝이는 피리이고 오보에와 클라리넷은 시커먼 피리이고 바순은 이상하게 생긴 피리이며 나머지 금관악기는 모두 크고 작은 나팔일 뿐이다. 각각의 악기 편성이 서로 다른 소리를 내는 것이 들리지 않으면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조화 또한 영원히 들리지 않는다. 음악의 언어는 어려우니 그 언어 밖의 사람들에게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막귀’는 현실 언어 공간에서는 결코 환영받지 못한다. 세대에 따라 말이 다르고, 성별에 따라 말이 다르다. 계층에 따라 삶에서 외치는 소리가 다르고, 종교에 따라 기원하는 세계가 다르다. 이러한 소리가 구별되어 들리지 않는다면 그건 귀의 문제가 아니라 귀를 통과해 들어간 소리를 받아들이는 머리와 마음의 문제이다. 안 들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듣고 싶은 소리만 듣는 것이거나 자기가 듣고 싶은 소리로 왜곡해 듣는 것이다. 현실의 말은 음악의 언어처럼 어려운 것도 아닌데 이런 사람들끼리는 앙상블도 기대할 수 없고, 이런 지휘자 밑에서는 미래의 희망을 그려볼 수도 없다.

“뮤지컬과는 다른,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이었습니다.” 뮤지컬만 보아오다 클래식 연주를 처음 들은 작가는 ‘형언’이란 어려운 말로 연주를 듣고 난 느낌을 표현한다. “형언할 수 없다 하시나 굳이 형언을 하자면 도전과 열정, 그리고 노력의 결정체라 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아나운서 출신답게 또박또박 말하지만 누군가 써준 뉴스 원고가 아니라 영혼의 목소리이다. “다른 건 모르겠고, 첼로 소리만 들렸어요. 눈물이 핑 돌 것 같은 첼로 소리.” 늦은 나이에 첼로와 사랑에 빠진 솔직한 감상평이다.

연주회장 인근의 빈대떡집, 낮에 내린 비에 공기도 길도 깨끗이 씻겨 내려간 야외의 테이블에서 끝없는 ‘형언’이 이어진다. 말소리는 물론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내지 못하게 하는 공연장의 ‘시체관극’이 입길에 자주 오르는데 이러한 관람문화의 원조는 클래식 연주회장이다. 대중음악 공연장에서는 환호성도 지르고 ‘떼창’도 하는데 이곳에서는 꿈도 못 꾼다. 악장 사이에 감동의 박수를 치고 싶은데 그랬다가는 무식한 사람 취급을 받는다. 그것이 무언의 약속이니 무언가의 공간에서는 묵언 수행을 하다 이런 공간에서 풀어놓으면 된다.

연주가 끝난 뒤 ‘화담(和談)’하는 연주자들, 이때의 언어는 우리와 같은 언어이니 평소에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음악의 언어도 들린다. 한성우 제공

연주가 끝난 뒤 ‘화담(和談)’하는 연주자들, 이때의 언어는 우리와 같은 언어이니 평소에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음악의 언어도 들린다. 한성우 제공

첨언(添言), 끝없이 덧붙여지는 말

“왜 굳이 WoO여야 했을까요? 창단 연주회이니 좀 더 대중적인 곡을 선택했으면 더 많은 호응이 있지 않았을까요?” 국회의원 선거가 있은 지 닷새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라 정치인의 소신이 담긴 정책보다는 지역 유권자의 구미에 맞는 공약을 앞세우는 것이 나을 거라는 말로 들린다. “지휘자 없이도 저리 화음이 잘 맞는 게 놀랍지 않은가요?” 최고의 연주자들이 목숨을 걸 듯이 서로의 소리를 들으며 앙상블을 이루어낸 결과에 대한 칭찬인데, 없느니만도 못한 리더에 대한 질책으로 들린다.

무언의 시간이 끝났으니 마음껏 형언하고 생각나는 대로 첨언하는 것은 자유다. 연주가 끝난 후 연주자들은 연주자들끼리 화담을 할 테니 마음 맞는 관객들끼리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자리는 축복이다. 탁 트인 공간에서 눈치 줄 이도 없으니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마음껏 꺼내면 된다. 원곡과 편곡이 모두 보이는 작곡 전공자는 말한다. 편곡자는 왜 이리 비올라 연주자에게 많은 짐을 지웠냐고. 온몸의 기를 모아 리드에 바람을 불어넣는 오보에 연주자를 보고 난 작가는 자신이 오보에 연주자가 아님에 감사한다. 호른의 그윽하고도 풍성한 소리에 반한 누군가는 언젠가 호른도 한번 불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생각해보면 모든 연주가 첨언이다. 그저 몇 마디의 지시와 음표로만 남겨놓은 작곡자의 말을 연주자들은 자신의 말로 다시 한다. 악보와 똑같이 연주한다면 그것은 컴퓨터가 연주하는 기계음일 수밖에 없다. 누군가 이전의 연주자를 흉내 내기에 바쁘다면 이는 중언부언(重言復言)에 지나지 않는다. 원곡은 있지만 누군가의 기획에 의해 교향곡이 독특한 편성의 실내악곡으로 편곡된다. 편곡은 작곡가의 몫이지만 연주는 연주자의 몫이니 그 편곡도 새롭게 해석된다. 연주회가 끝난 후 관객의 첨언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편곡, 편성, 연주 또한 바뀔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첨언이다.

大同江水何時盡

대동강 물은 어느 때 마르려는지

別淚年年添綠波

해마다 이별 눈물 푸른 강물에 더해지네

밤이 깊어가니 빗물에 씻긴 가로수의 나뭇잎 빛깔이 점점 더 짙어진다. 이제 모임을 끝내고 이별을 고해야 하는 순간 정지상의 한시 ‘송인(送人)’의 두 구절이 떠오른다. 아무리 이별이 흔하고 눈물이 많아도 대동강 물에 영향을 줄까 싶지만 정지상의 허풍이 나쁘지만은 않다. 젊은 연주자 9명이 시도한 화담, 그리고 이제까지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화담 역시 마르지 않을 것이다. 누구든 새로운 연주를 선보이며 첨언을 그치지 않는다면.

소싯적에 바이올린을 배웠던 전직 아나운서가 연말 공연을 제안한다. 새로 시작한 첼리스트의 첫 무대를 연말에 갖자고 한다. 현이 둘이니 관으로 한 자리를 같이하겠다고 약속한다. 악기와는 조금 거리가 있는 작가는 목소리로 참여하겠다고 말한다. 새로운 앙상블이다. 50년 전 바이올린과 1년이 채 안 된 첼로가 함께하니 멋진 앙상블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현 둘에 관 하나, 여기에 보컬이 함께할 만만한 곡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 또한 문제 될 것은 없다. 각자의 삶을 살다가 서로의 소리를 들으며 하루라도 화음을 만들어내려는 시도만으로 충분하다. 그것이 화담이다.

■필자 한성우

[한성우의 말과 글의 풍경]음표라는 작곡가의 말을 자신의 말로 표현하는…연주는 ‘첨언’이다


한국어의 방언과 말소리를 연구하는 국어학자이다. 삶 속의 말과 글을 쉽게 이해하고 깊게 생각하도록 돕는다. 첼로를 사랑하는 목수로서 또 하나의 삶을 살고 있다.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해 박사까지 마쳤다.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어규범정비위원회 위원이며, 한국방언학회 수석부회장이다. 문화방송(MBC) 우리말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방언정담> <우리 음식의 언어> <노래의 언어> <문화어 수업> <말의 주인이 되는 시간> <꿈을 찍는 공방> <방언, 이 땅의 모든 말>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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